죽음, 장례와 관련해 떠오르는 단상 33
죽음, 장례와 관련해 떠오르는 단상 33
  • 안양준
  • 승인 2024.03.13 10: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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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 가운데」 속에서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 가운데」라는 소설이 한국에서 크게 알려지게 된 원인은 불꽃같은 삶을 살다가 31세에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삶을 마감한, 한때 <전혜린 신드롬>을 불러 일으켰던 작가가 번역한 까닭이라 생각된다.

원제는 <Mitte des Lebens>으로 우리말로 번역하면 ‘인생의 중년’이라 할 수 있는데, 소설을 읽으며 여주인공 니나의 삶을 각인시키고자 ‘생의 한 가운데’라는 제목을 붙이고 그로 인해 더 큰 호응을 얻었으리라는 생각도 갖게 된다.

소설은 여주인공의 언니 ?열두 살 차이의- 가 우연히 호텔바에서 니나를 보게 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언니가 추억하는 열두 살 시절의 니나는 “귀여운 곳이라고는 단 한 군데도 없는 말라깽이인 데다가 팔다리에는 어디서 할퀸 상처 투성이었고 자신의 결혼식에 하녀처럼 면사포를 들라고 말하자 면사포에 침을 뱉었던” 자신에 대한 모든 간섭을 거부함으로 이후로 그녀의 일에 일체 상관하지 않았던, 그리고 남편을 따라 외국으로 간 후 거의 잊어버렸던 부정적 이미지였다.

놀랄 만큼 변해 있는 여동생은 여전히 예쁘지는 않았지만 매력적이고 야성적인 무언가를 풍기는 ?눈에 띄는 차림을 하지 않았음에도 모든 남성이 돌아보는- 서른일곱의 나이답지 않게 젊어 보였다.

잠깐의 만남 이후 9개월이 지난 어느날, 갑자기 걸려온 전화에 다음주 런던으로 떠난다는 말을 듣고 뮌헨에 가서 함께 한 며칠이 이 소설의 등장 배경이다. 당시 니나에 대해 아는 것은 스물여섯에 임신을 했으며 그 아이의 아버지와 결혼했고 몇 년 후에 이혼했으며 히틀러 치하에서 체포를 당했다는 사실과 불안정한 생활 속에서도 좋은 작품을 썼다는 것 정도였다.

그녀가 런던으로 떠나려는 이유는 단지 누군가를 더 이상 방해하지 않으려는 자신의 극기(克己)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발로 우편물을 걷어차며 지긋지긋하다고 투덜거리는 니나 앞에서 언니는 궤짝에 앉아 소포를 풀어 ‘니나에게’라고 씌어 있는 편지를 보았고 그녀를 사랑한 의사 슈타인의 일기(日記)를 읽게 된다.

니나를 처음 만난 날의 일기는 “새로 여자 환자가 생겼다”는 글로 시작된다. 처음엔 말라깽이 어린애인줄 알았는데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그녀를 안아서 자동차로 데려갈 때는 침대로 데려가는 기분이었고 질투심이 강하고 예민한 여동생이 언제부터 환자를 오빠 자동차로 데려갔느냐고 빈정거리는 것처럼 그런 일은 처음이었다고 한다.

니나는 당시 죽음에 관해 생각하고 말했다. 

“선생님, 간절한 소망과 믿음에 의해 죽음에 이를 수는 없을까요?”

그러나 차츰 건강이 회복되면서 책을 읽기 시작하고 슈타인이 가져다주는 건 닥치는 대로 다 읽었고 건강해진 뒤 공부를 계속했고 슈타인의 일기도 긴 공백이 있었고 자신의 인생이 한 여인으로 인해 바뀌었다고 적혀 있다.

“난 생의 가운데를 떠돌아다니고 있어. 집시처럼. 문젠 그거야. 나는 아이들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속해 있지 않아. 내 생에는 확실한 선이란 없어.”

언니와의 대화 속에 한 말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한 남자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여인,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했던 여행과 그렇게 보냈던 하룻 밤의 추억…. 하지만 일기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때의 일을 다시 상기한다는 것은 견딜 수 없다. 나는 무서운 마비 상태에 빠져들고 말았다. 생은 내게 복수한 것이다. 내가 그처럼 오래 생에 대해 역으로 살아온 것의 복수였다. 나는 그날 밤 잠들지 않았다. 새벽이 다가왔을 때 나는 영원히 그녀의 곁을 떠나리라 작정했다. 그토록 어지럽혀진 밤을 니나는 결코 용서하지 않으리라.”

이후 니나에게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니나가 쓴 소설 속의 한 장면에는 1945년 4월을 기점으로 한나라는 여인이 형무소 감방 문이 열리며 400명의 여인들이 석방되는 틈바구니 속에서 함께 나오게 된다. 그리고 만나게 된 한 남자와 소년을 돕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언니는 글 속의 한나가 니나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니나는 잡혀갈 위기에 있는 사람들을 빼돌려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도록 돕는 반나치적인 행동들을 해왔다. 그로 인해 반란 방조죄로 15년 징역이 구형되기도 하지만 모든 일이 비밀리에 진행되었고 그 일을 위해 니나는 슈타인에게 도움을 청한다.

결핵 때문에 자신의 병을 고쳐주길 바라며 찾아온 니나에게 슈타인은 자신의 친구인 브라운 박사에게 가라고 말한다. 다행히 음성으로 판정되었지만 브라운은 그녀를 사랑하게 되고 그로 인해 니나는 임신을 하게 된다. 그리고 기차에서 만난 퍼시라는 남자를 만나고 그를 소개하기 위해 함께 슈타인을 만나러 간다. 퍼시와 결혼해선 안된다는 걸 매우 확실하게 느꼈지만 느낌으로 끝나고 말았다고 말한다.

슈타인의 일기에는 “그후 나는 그녀의 결혼 소식과 초가을에 첫 딸 루트를 낳았다는 소식 외에는 들은 바가 없다.”라고 쓰여 있다.

두 번째 임신 후 니나는 자살을 시도하고 퍼시와의 결혼은 결국 파경을 맞이하여 이혼하게 된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나치의 수배자를 빼돌리는 일은 브라운 박사를 기점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를 스위스로 갈 수 있도록 하는데 성공하였지만 슈타인의 일기에 1947년 러시아 포로 수용소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받았다고 적고 있다. 퍼시가 게슈타포에게 체포 당하여 죽게 되었을 때 죽음의 고통을 덜게 해 주려는 의도로 슈타인을 찾아가 독약을 조제해 줄 것을 요청할 때도 심각한 고민에 빠진다.

결국 니나가 떠난다는 소식을 접한 슈타인이 급히 뮌헨으로 달려오지만 이를 눈치챈 니나는 먼저 런던으로 떠난 후였다. 

20년이라는 나이 차가 있는 의사와의 사랑, 전쟁이라는 돌발적인 상황, 여주인공의 평범하지 않은 인생관 등으로 많은 이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생의 한 가운데」라는 책 속에 의외로 죽음에 관한 대목이 많이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나는 지옥이 어떤 곳인가에 관해 확실한 상상을 할 수 있어. 언닌 어때? 그건 사람이 완전무결하게 혼자가 되어 결코 다시는 사랑할 수 없으리란 것을 느끼고 이제 다시는 영원히 어느 한 사람과 만날 수 없으리란 걸 아는거야. 그리고 다시는 사랑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아는 것도….”

지옥을 다분히 관념적으로 설명하지만 모든 것이 불가능한 곳이라는 표현은 다른 이들에게도 공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제가 죽어야 한다면 전 알고 싶어요. 죽음이란 중요한 거예요. 그리고 또 한번 밖에 체험할 수 없는 건데 그것을 어떻게 의식없이 맞이할 수가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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