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장례와 관련해 떠오르는 단상 37
죽음, 장례와 관련해 떠오르는 단상 37
  • 안양준
  • 승인 2024.04.10 10: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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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쉬킨의 「대위의 딸」 속에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픔의 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늘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지나니

푸쉬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시는 한 번쯤은 들어본 적이 있을 만큼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시가 아닐까 생각한다.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푸쉬킨, ‘러시아 최초의 소설가’라고도 불리는 그의 삶을 그의 작품 「대위의 딸」을 통해 다시 한 번 조명해보고자 한다.

소설 속의 주인공 그리뇨프는 퇴역 장교의 아들로 아홉 명의 자녀 중 유일하게 살아남았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가까운 친척인 근위대 소령의 도움으로 태어나기도 전에 중사로 등록했다고 한다. 이러한 불법이 자행되던 때 –물론 소설에서는 부친의 노력이 전혀 성과가 없었음을 보여준다- 였기에 거대한 반란이 일어나게 된 원인 제공을 한 것이 아닐까?

열일곱의 어린 나이에 부친의 욕심으로 군에 입대하기 위해 가는 도중 길을 잃게 되는데 우연히 만난 농부의 도움을 얻게 되고 감사의 답례로 입고 있던 토끼 가죽 옷을 내어준다. 이처럼 우연히 발생한 사건이 주인공과 민란을 일으켜 스스로 황제가 되었던 푸가체프와의 만남이다.

주인공이 근무하게 되는 요새 사령관인 이반 쿠즈미츠 대위, 주인공은 그의 딸 마리아 이바노브나와 사랑의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주인공과 연적이 되며 푸가체프가 난을 일으켰을 때 배반할 뿐 아니라 계속 괴롭힘의 대상이 되는 시바블린과의 결투는 실제로 자신의 아내 나탈리아와 추문을 일으킨 단테스와의 결투로 죽게 되는 자신의 삶을 예견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지만 실제 푸쉬킨의 죽음도 결투로 인한 것이다. 주인공처럼 푸쉬킨도 퇴역장교의 아들로 태어났다.

푸가체프가 볼품 없는 농민으로 묘사되고, 그가 자신이 입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여러 차례 도움을 주는 과정은 있지만 그의 뜻에 동조한 적이 없었고 반란이 실패로 돌아가 처형당하는 과정에도 개인적인 연민은 느끼지만 그의 죽음이 부당하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실제 푸쉬킨의 삶은 농노제와 전제정권을 비난하고, 국민을 억압하는 지배 계층을 증오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처럼 푸슈킨의 창작 활동의 원동력이 ‘자유사상’이다. 결국 정열적이고 반항적이며, 자유를 갈망하는 문학 청년은 전제 관료인 총독의 미움을 사서 무기한 추방당한다.

이후 새로 즉위한 니콜라이 1세가 사면을 약속하고 후견인이 되어주기로 약속하지만 오래지 않아 실망하게 되는데 황제가 그의 작품 발표를 허가하지 않았고 경찰 감시가 떠나지 않았으며 경제적 궁핍이 더욱 어렵게 했기 때문이다. 

이후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으나 약간은 천박한 16세의 젊은 처녀 나탈리아 곤차로바와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신청하지만 출세길이 막힌 작가라는 이유로 거절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다음 해 다시 구혼하고 결국 허락을 얻어 결혼하게 된다. 하지만 결혼생활 역시 행복으로 이어지지 못하였는데 나탈리아와 기병대에 근무하는 프랑스 장교와의 사이에 추문이 나돌며 귀족들이 소문을 퍼뜨리고 그로 인해 결투를 신청하고 치명상을 입어 이틀 후에 생을 마감하고 만다.

귀족과 관리들의 교묘한 음모에 말려 목숨을 잃게 되고 시신마저도 경찰의 감시를 벗어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국민들의 조문 시위를 우려한 정부가 장례미사까지 어둠 속에서 몰래 해치우고 말았다. 

「대위의 딸」은 푸가초프 반란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푸슈킨은 이 작품을 쓰기 위하여 궁중에 보관된 극비문서들을 샅샅이 조사하고 직접 반란 현장에 가서 자료를 수집하였다. 푸가초프 반란 사건은 러시아 근대국가의 형성과 이로 인해 생겨난 지배 권력에 저항하는 농민 반란의 역사이다. 

러시아 문학은 푸쉬킨을 선두로 하여 톨스토이, 토스토예프스키, 막심 고리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등의 작품을 대할 때마다 그들이 자신들의 조국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바라볼 수 있다. 그럼에도 그들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악, 러시아 국민들의 신앙심은 그들이 정교회를 대하는 모습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백성들의 바람은 외면하며 자신의 권력에만 눈이 어두웠던 황제들, 봉건 영주들...

결국 더 나은 세상을 꿈꾸었던 간절한 소망은 볼셰비키의 거짓된 선전 앞에서 또다시 철저하게 무너져 내리지 않았는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픔의 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

정말 그런 날이 올 것이라 생각하며 이러한 싯구를 읊은 것이 아닐까?

기독교 신앙은 이 세상은 소망을 둘 곳이 못된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래도 이 땅에서 무언가의 변혁, 변화가 일어나기를 소망하며 하루하루의 아픔을 견디며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대위의 딸」에서 마리아 이바노브나가 만난 귀부인, 그녀는 마리아의 글을 끝까지 읽으며 다시금 자신의 집으로 초청한다. 그녀가 누구인가? 여왕이다. 어린 소녀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진상을 조사하여 누구의 말이 참인지를 구별하는 능력, 이런 것이 국민이 지도자에게 원하는 요구 사항이 아닐까?

총선을 치르는 오늘 아침에 금번 선거는 해외자 투표와 사전 투표에서 신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당연히 백성들이 간절하다는 의미이다. 그런 백성들의 간절함을 얼싸안을 수 있는 지도자들이 되기를, 그런 자들을 잘 선택할 수 있기를...

기독교인은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가지만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자신들의 기대감을 채울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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