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장례와 관련해 떠오르는 단상 36
죽음, 장례와 관련해 떠오르는 단상 36
  • 안양준
  • 승인 2024.04.03 09: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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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체홉의 「귀여운 여인」 속에서

‘귀여운 여인’은 안톤 체홉이 만년에 쓴 단편 소설이다. 체홉 소설의 특징은 간결성과 객관성이라 할 수 있는데 주관적 요소를 철저히 배제하는 것은 느낀 점을 독자의 몫으로 온전히 돌리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귀여운 여인’에는 어쩌면 모순적이라 할 수 있는 서정적 요소가 미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서두에 “올렌카는 항상 누구를 사랑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여자였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존재이지 않는가? 그런 의미에서 주인공은 모든 사람을 대표하는 인물로 보아도 무방하겠지만 조금은 더 극단적인 인물로, 그러한 그녀의 삶을 곁에서 관찰하며 덤덤하게 쓰고 있다.

안톤 체홉의 또다른 작품인 ‘사랑에 대하여’에 알료힌은 “사랑은 개인의 행복 문제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해 보면 모르는 일투성이이고, 따라서 또한 어떤 것이나 좋을 대로 논할 수 있지요. 이제까지 사랑에 관해서 언급한 다시 없는 진리는 단 하나밖에 없어요. ‘그것은 위대하고 신비한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 밖에는 사람이 사랑에 관해서 말하거나 글로 쓰거나 한 것은 어느 것이나 다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고, 단지 제기한 것에 지나지 않아요. 그러므로 문제 그 자체는 여전히 미해결인 채 남아 있는 셈입니다.”라고 말한다.

실제로 사랑은 무엇이라고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삶 속에서 자신이 체험한만큼 알 수 있는, 그렇기에 사람마다 경험한 사랑은 누구나 다를 수밖에 없겠지만, 그럼에도 사랑은 위대하고 신비하다고까지 표현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올렌카는 어릴 적 아버지를 무척 따랐고, 2년에 한 번씩 다니러 오는 숙모도 사랑했고, 여학교 시절에는 불어 선생님을 사랑했다. 착한 성품과 상냥한 미소에 사람들은 그녀를 ‘귀여운 아이’라고 생각했다. 퇴직한 8등관인 아버지는 살고 있는 집을 유언장에 그녀의 이름으로 올려 놓았다.

자신의 집에 세들어 있던 쿠우킨은 야외극장인 치볼리의 경영자이자 연출가로 계속 내리는 비로 인해 올렌카에게 불평을 털어놓는다. 그런 그의 불행에 마음이 움직여 사랑하게 되었고 얼마 후 그의 청혼을 받아 교회에서 결혼 예식을 올리게 되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만나는 사람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연극이고 교양인이 되기 위해서는 극장엘 가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의 의식 수준이 너무 낮다는 등 남편의 말을 그대로 옮기기 시작한다. 배우들도 그녀를 잘 따르고 사업도 잘 되어가는 중에 출연 교섭을 위해 모스크바로 떠난 남편이 급사했다는 전보가 날아왔다.

남편을 잃은 그녀는 통곡하며 비탄에 젖지만 석 달이 지나 목재상인 푸스트발로프라는 남성을 통해 위로의 말을 듣게 된다.

“만일 누군가 죽는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 경우 마음을 다부지게 먹고, 참고 견뎌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때부터 그가 좋아졌고 혼담이 성사되어 결혼하게 된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목재상을 경영해 온 것처럼 “재목 값이 해마다 이십 퍼센트씩이나 오르고 있어요. 운임이 아주 엄청나요!”라는 남편의 말을 사람들에게 하기 시작한다.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그녀에게 또다시 불행이 다가온다. 재목이 발송되는 것을 보기 위해 모자도 쓰지 않고 나갔다가 감기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된 것이 낫지 않고 넉달이나 신음하다가 남편이 죽고만 것이다.

남편이 살아 있을 때 군대 수의관이었던 스미르닌이라는 남성이 가정생활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일찍 결혼하여 아들도 있는데 아내가 바람을 피워 헤어지게 되었고, 아들 양육비로 매월 송금하고 있다는 말을 들으며 가엾게 느껴진 것이다.

“이봐요, 스미르닌 씨, 부인과 화해하세요. 아드님 때문이라고 생각하시구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그 가정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드리기도 했는데 남편이 죽은 후 그가 그녀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그녀는 또다시 가축 검사를 제대로 하지 않아 병이 퍼지고 있다고 이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된다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 다른 여인이라면 비난의 대상이 되었겠지만 올렌카에 대한 환심이 오히려 그녀를 감싸주었다.

하지만 그 행복도 오래 가지 못하였다. 그가 연대를 따라 멀리 시베리아로 이동하였고 그로 인해 외톨이가 된 것이다. 젊고 아름다웠던 시절도 지나갔고 행복을 꿈꿀 수 없는 울적한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날 갑자기 그가 돌아왔다. 부인과 결합하여 셋집을 찾고 있다는 말에 자신의 집에 들어오라며 자신이 건넌방으로 옮긴 것이다. 지붕을 칠하고 벽에 회를 바르며 활기가 넘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사샤라는 그의 아들을 마치 자기 아이처럼 여기는 것이다.

아이들이 배우는 것이 너무 어렵다며 이야기하고 학교가는 길을 뒤따라가며, 이처럼 기쁘고 마음이 뿌듯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아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까지 버릴 것이라 생각한다.

오래전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예쁜 외모에 학교 교사였던 여인이 타락하고 중학생들에 의해 맞아 죽은 사건을 영화화한 것인데 어릴적 아버지를 웃게 하기 위해 이상한 표정을 짓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사랑받기 위해 그런 행동까지 해야 했던 것이 비참한 삶의 결말로 가게 된 원인이 아니었을까? 

물론 영화와 달리 ‘귀여운 여인’은 해피엔딩으로 끝나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길 원하고, 자신이 원하는 사랑을 하길 원하지만 삶은 자신의 원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지으셨지만 언약을 어김으로 죄인된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죄를 사해주시고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이다. 그 사랑이 완전한 사랑이요, 아가페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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