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장례와 관련해 떠오르는 단상 31
죽음, 장례와 관련해 떠오르는 단상 31
  • 안양준
  • 승인 2024.02.28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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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 속에서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우리에게 작가라기보다는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 유명한 <가을날>이라는 시의 첫 대목을 읽어본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십시오. / 들에다 많은 바람을 놓으십시오.”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서 태어난 귀족 출신의 릴케는 타고난 보헤미안 기질로 수많은 도시를 여행하며 유럽 전역의 예술가들과 사귈 수 있는 기회를 갖음으로 20C 유명한 예술가 치고 릴케와 친분을 맺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너무나 잘 알려진 조각가 로댕의 수행 비서로 약 1년간 지내기도 했는데 로댕의 작품세계를 통해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부인 클라라 베스토프 역시 로댕의 제자라고 알려져 있으며, 심지어 「로댕론」이라는 책까지 집필하였다.

일찍 친분을 맺은 앙드레 지드, 루이 살로메, 그리고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 파스테르나크 등이다. 어린 시절부터 병약했던 그는 52세의 나이에 요양원에서 삶을 마감한다. 흔히 ‘장미 가시에 찔려 죽은 시인’이라는 상투어는 장미를 꺾다가 가시에 왼 손가락이 찔렸는데 그로 인해 패혈증세가 나타나 그로 인해 사망하게 된 까닭이다.

‘수기’란 쉽게 말하면 일기와 비슷한 형태이다. 자신의 일상을 글로 남기는 것인데 말테의 수기처럼 일정한 시간의 틀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떠오르는 영감에 따라 글을 써내려가는 방식이다.

사실 ‘말테의 수기’는 읽기가 그리 쉬운 책은 아니다. 유난히 ‘죽음’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하며, 심지어 유령을 직접 보았다는 그것도 혼자 그런 것이 아니라 가족들이 함께 공유하는 모습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그러면 책의 줄거리나 특별한 내용들을 간추려 보고자 한다. 

“사람들은 살겠다고 이 도시로 모여드는데 내가 보기엔 죽으러 오는 것 같다. 거리로 나갔다. 한 남자가 길을 가다가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만삭이 된 임산부가 벽을 따라 힘겹게 걷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병원, 늦여름 거리에서 풍기는 온갖 냄새들 속에 불안이 깃들여 있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디외 병원에는 지금 559개의 침대가 있다. 사람들은 이곳에 들어와 똑같은 방식으로 숨을 거둔다. 마치 공장에서 대량으로 제품을 찍어내듯 병원이 죽음을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글은 시작된다. 3주간 머물던 파리의 풍경을 마치 죽음을 양산하는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거대 공장처럼 말이다.

그리고 궁정 시종관이던 외조부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한다. 평생 강하게 사시던 그 분의 죽음은 마지막까지 저항하는, 그래서 주위 사람들을 끝까지 힘들게 하며 막바지에 폭군처럼 군림한 것을 말테는 할아버지다운 죽음으로 묘사한다.

어머니의 먼 친척인 마틸데에게서 죽은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했는데 그녀가 식당에 나오지 않아 할아버지에게 묻자 “크리스티네를 만나고 싶지 않다는구나.”라고 대답한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어두운 식당의 한쪽 문이 열리고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이 우리 옆을 지나 반대편 문으로 사라지는데 그녀가 누구냐고 묻자 할아버지는 담담하게 “크리스티네 브라에야.”라고 대답했는데 이 대답에 아버지는 파랗게 질려 황급히 식당을 빠져나갔다. 그 여자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아버지와 내가 그곳에 머무는 동안 크리스티네의 유령은 그후로도 세 번 더 나타났다고 한다.

파리에 있을 당시 그의 가난에 대해 “국립도서관에 앉아 시인의 작품을 읽고 있으면 내가 얼마나 비참한 가난뱅이인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아직 내 셔츠 깃은 더럽혀지지 않았고 내의도 깨끗하지만 거리에 나가면 내 실체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다. 운명이 내뱉은 타액과 같은 인생의 낙오자들, 걸인들, 행상 노파, 그들은 내가 자기네와 같은 부류라는 것을 간파하고 은밀한 신호를 보낸다. 나는 두렵다.”라고 쓴다.

릴케가 쓰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섬세하고 연약한 분으로 바늘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지만 죽은 잉게보르크에 대해 말씀하실 때만큼은 불안을 잊는다고 한다.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릴케의 약력에는 누이 하나가 있었지만 일찍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마 그녀라고 생각하는데 그녀가 죽고 장례식이 끝난 후 가족들이 테라스에 있을 때 우편배달부가 올 시간엔 이를 받아오는 것은 잉게보르크의 몫이었는데 개의 눈에 무엇이 보였는지 달려나가 마중하듯이 보이지 않는 무언가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낑낑거리다가 공중으로 한 번 뛰어오르고 땅에 떨어져 움직이지 않는데 이미 죽은 것이었다 라고 했다.

그러한 사건 때문인지 부모는 이혼을 했고 어머니 역시 그리 오래 사시지 못했다. 아주 어릴 적 그림을 그리다가 빨간 색연필을 잡으려 했는데 떨어져 어두침침한 탁자 밑으로 기어 들어갔는데 움직이는 손이 물 속에서 헤엄치는 동물처럼 보여 갑자기 무서움에 소스라쳤다고 한다. 또 위층에 사용하지 않는 객실이 있는데 그 방에 몰래 들어가 장롱 속에 가장무도회의 복장을 입고 가면까지 쓰고 거울을 보는데 낯선 사람이 서 있는 게 아닌가! 너무 놀라 가면을 벗어보려 하지만 벗겨지지 않았다고도 한다. 

아버지 사후에 유품을 정리하다가 오랫동안 품에 간직하던 쪽지를 발견했는데 거기엔 크리스티안 4세의 임종 장면이 기록되었는데 평생 강하게 살아오신 아버지도 죽음을 몹시 두려워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죽음의 공포가 시작된 것이 그때부터였다고 한다. 혼자 있을 때 공포를 느꼈고 밤이면 쓸쓸히 죽어갈 것을 상상하며 침대에 앉아 두려움에 떨며 필사적으로, ‘죽은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없지, 난 아직 살아있는 거야.’라고 중얼거리며 위로를 삼았다고 한다.

릴케는 책에서 아벨로네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쓰고 있다. 어머니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던 그녀는 독서하는 법도 가르쳐주고 학창시절 함께 했던 나날이 내 인생에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그리고 끝 무렵에 탕아의 이야기를 한다. 릴케는 탕아의 이야기가 사랑 받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의 전설이라 확신한다. 떠날 것이다. 영원히 가버리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 받는 끔찍한 상황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 결코 사랑하지 않기로 얼마나 굳게 결심했는지는 훨씬 뒤에야 깨달았다. 수년이 흘러 머리에 떠올랐을 때는, 다른 계획들처럼 이 계획도 실현불가능해져 있었다. 그럴 것이 그는 고독 속에서 사랑하고 또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말테의 수기가 쓰여진 후 릴케는 앙드레 지드의 「탕아 돌아오다」를 번역하기도 하였다. 일생을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갖고 살았던 릴케의 삶에서 내면을 깊이 바라보는 인간일수록 죽음의 문제에 직면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물론 유령의 이야기처럼 일반인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오히려 일반인들이 쉽게 받아들이기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온전한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았기에 누군가 바른 신앙으로 이끌어줄 수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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