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장례와 관련해 떠오르는 단상 29
죽음, 장례와 관련해 떠오르는 단상 29
  • 안양준
  • 승인 2024.02.14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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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크 뷔히너의 「당통의 죽음」 속에서

「당통의 죽음」을 이해하려면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약간의 지식이 필요하다. 18세기 등장한 ‘부르주아’ 계급은 봉건적 체제의 몰락을 예고하였고 그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 낡은 봉건적 신분 제도로부터의 탈피를 목적으로 봉기한 시민혁명이다.

대부분 혁명의 직접적 동기가 재정적 문제인 것처럼 루이 16세 당시 미국 독립전쟁에 참여함으로 45억 루블의 빚을 안게 되고 그로 인해 백성들은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었다. 루이 16세는 면세 특권의 성직자와 귀족들에게 세금을 부과해 재정난을 타개하려 했지만 강력한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제 3신분에게 손을 벌리지 않을 수 없었고 그로 인해 삼부회가 결성되었다.

당시 프랑스 인구 2,700만 명 중 제1신분인 성직자가 10만 명, 제2신분인 귀족이 40만 명으로, 이들이 전 국토의 10분의 1과 5분의 1을 소유했다. 이들을 제외한 전 인구의 96퍼센트가 제3신분에 속했고, 이들 중 농민은 총인구의 4분의 3으로 토지는 소유했으나 규모가 작아 지주에게 소작을 얻어야 했고, 세금이 많아 수입 절반을 착취당했으며, 노동력을 수시로 징발당했다. 

그런 상황에서 제3신분의 대표는 삼부회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지만 들러리에 불과했다. 이러한 부조리를 목격한 이들이 국민의회를 만들었고 황제가 군대를 소집하여 국민의회를 해산하려 하자 격분한 시민들이 민병대를 조직하여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고 치열한 전투 끝에 함락하고 수비대 전원을 잔인하게 학살한 사건이 프랑스 대혁명이다. 이후 국민의회에서 발표한 〈인권선언〉은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롭고 평등하다. 주권은 왕이 아닌 국민에게 있다.”는 내용으로 루이 16세는 이를 승인한다.

혁명군에게 사로잡힌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탈출하다 잡힌 사건이 발생하는데 왕비의 친정인 오스트리아로 망명하여 군대를 이끌고 왕권을 되찾으려는 속셈이었음이 밝혀지자 결국 재판에 회부되어 단두대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다. 이후 프랑스에서 발생한 혁명이 자국에 미칠 영향을 우려하여 연합군을 형성하여 진격할 때 민중들은 피흘려 이룩한 혁명의 싹이 꺾이지 않도록 의용군에 자원하였고 기적적으로 조국을 구해내었는데 이때 부른 <라 마르세예즈>가 오늘날 프랑스 국가가 되었다.

작품에 등장하는 시몽과 그의 아내의 이야기는 당시 상황을 잘 보여주는 하나의 에피소드라 할 수 있다. 시몽이 그의 아내를 윤리적으로 더러운 인간이라 욕하며 폭력을 휘두르자 사람들이 그를 말리며 자초지종을 물을 때 그의 아내가 하는 말이 딸이 자신의 몸을 팔아 그나마 남편이 술이라도 마실 수 있다며 자신도 예전에 그렇게 살아왔다고 항변한다. 이를 들은 시민들은 그에 대한 화를 귀족들에게 돌린다.

시민 3은 이렇게 말한다.

“그자들은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귀족들은 늑대니 때려죽여라.’ 그래서 우리는 귀족들을 가로등에 매달았습니다. ‘국왕의 거부권이 여러분의 빵을 빼앗아 먹는다.’라고 해서 우리는 거부권을 폐지했습니다. 그들이 ‘지롱드파 때문에 우리가 굶주린다.’라고 해서 우리는 지롱드파를 처단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죽은 자들의 옷을 벗겨 입었고,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맨발로 추위에 떱니다. 그놈들의 넓적다리 살가죽을 벗겨 우리 바지를 만들고, 그놈들 몸의 기름을 짜 우리 수프에 넣어 끓입시다.”

이것이 혁명 후 모습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그리고 국민의회 우두머리로 이제는 온건파로 변해버린 당통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는 것이 이 책의 소재이다. 당통과 그와 함께 한 자들을 단두대에 세우기까지의 10일 가량의 상황을 소상하게 그린 것이 <당통의 죽음>이라는 희곡인 것이다. 물론 책에는 무게감을 줄이고 있지만 당시 당통을 포함해 3만 5,000명이 단두대로 올라갔고, 무려 50만 명이 투옥되는 서슬 퍼런 공안통치가 펼쳐진 것이다.

물론 혁명은 그 목적을 이룰 때 성공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당통은 본질에서 벗어난 인물, 현대적 용어로 ‘수박’같은 존재라고도 할 수 있다. 책에 쓰여진 글들을 통해 당시 상황을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지난 8월과 9월의 피 몇 방울로는 민중의 뺨을 붉게 물들이지 못했습니다. 단두대가 너무 느려요. 우리에겐 집중 호우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자비심 때문에 혁명은 죽어 가고 있습니다. 귀족이 숨 쉴 때마다 자유의 목은 그르렁거립니다. 비겁한 자는 공화국을 위해 죽을 뿐이고, 자코뱅파는 공화국을 위해 그들을 죽입니다.”

“국가 체제는 국민 몸에 딱 들어맞는 투명 옷 같아야 해.”

“우리가 혁명을 만든 게 아니라, 혁명이 우리를 만들었어. 그리고 일이 성사된다고 하더라도, 난 남을 단두대로 보내기보다는 차라리 스스로 단두대에서 처형당하겠어. 이제 신물이 나. 왜 우리 인간들이 서로 싸워야 하지?”

“혁명은 펠리아스의 딸들과 같습니다. 혁명은 인류를 다시 젊어지게 하기 위해 갈기갈기 찢어 놓습니다. 홍수의 거친 물살을 헤치고 대지가 육중한 팔다리로 몸을 일으키듯, 인류는 마치 처음 창조되는 것처럼 피의 솥에서 몸을 일으킵니다.”

책에서 볼 수 있듯 혁명은 분명 좋은 의도이나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당통을 제거한 로베스피에르 역시 몇 개월 후 단두대에 서게 되고 이후 다섯 명의 총재로 이루어진 ‘총재 정부’는 무능하여 민중들의 불만은 더 커졌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군부에 의존한 결과 화를 불러들였는데 이때 군부를 장악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이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다.

성경은 구약의 수많은 전쟁들을 기록하고 있다. 성경이 바라보는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다. 물론 전쟁 뿐 아니라 모든 것이 여호와께 속한 것이다. 

한 개인의 죽음만이 아닌 수많은 이들의 죽음을 동반하는 경우 예수님이 바라보는 시점은 ‘실로암 망대’ 사건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다. 즉 한 개인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고 나 자신의 구원에 포커스를 맞출 것을 명령하신다.

그럼에도 잘못된 제도를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의 바른 자세는 무엇일까? 성경은 이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단 하나님이 시대에 쓰시고자 하는 사람들을 들어 쓰신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노아처럼, 요셉처럼, 모세처럼, 다니엘처럼, 느헤미야처럼, 에스더처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는 자들을 통해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는 점이다.

물론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개인의 죽음은 다수의 죽음과 상관없이 그가 구원얻을 믿음을 가졌는가 만이 중요할 뿐이다. 최우선순위가 개인의 구원이요, 이후 사회나 국가를 위해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동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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