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장례와 관련해 떠오르는 단상 25
죽음, 장례와 관련해 떠오르는 단상 25
  • 안양준
  • 승인 2024.01.17 09: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C.S.루이스의 「천국과 지옥의 이혼」 속에서

C.S.루이스의 「천국과 지옥의 이혼」은 머리말에 소개한 것처럼 윌리엄 블레이크의 「천국과 지옥의 결혼」을 모티브로 한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천국과 지옥의 결혼을 성사시키려는 시도를 한다. 어떻게든 양자를 다 포용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생각하는 믿음, 그저 악을 약간 조정하고 발전시키면 선으로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이런 믿음은 파국으로 치닫는 실수이다. 선(善)은 농익을수록 악과 구별될 뿐 아니라 다른 선과도 구별된다. 잘못된 길을 택해서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길을 택했을 때 올바른 길로 돌아와야 구원받을 수 있다. 천국을 받아들이려면 지옥이 남긴 아주 작은 미련조차 버려야 한다. 

주인공은 버스를 타기 위해 줄을 선다. 해가 막 저물고 비가 내린다. 도착한 버스는 금빛 광채로 눈부시게 빛났으며, 근사한 문장(紋章)이 그려져 있고 운전사도 빛으로 가득 차 있는 듯하다. 

옆자리에 앉은 더벅머리 시인은 한 번도 자식을 알아준 적 없는 부모, 자신의 재능과 성격을 키워 준 곳은 한 군데도 없는 학교를 다섯 군데나 다녔다. 시험 체제의 부당함과 부조리가 대학에 들어가서야 단순한 우연의 소산이 아니라 경제 체제의 불가피한 결과물임을 깨닫기 되었다. 유난히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한 그는 이후 기차 밑에 몸을 던졌다….

더벅머리 시인 대신 옆자리에 앉게 된 사내는 그들이 떠났던 회색 도시에 대해 거리가 텅텅 빈 것은 거기 사람들이 툭하면 싸우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결국 참다못해 이사 갈 마음을 먹고 만에 하나 집들이 차 있을 경우 더 먼 곳을 찾는다고 한다. 이 도시에서는 집짓기가 생각만 하면 지어질 정도로 수월하여 도시가 자꾸 확장된다고 한다.

주인공이 탄 버스는 지옥 언저리에서 천국 언저리로 가는 버스이다. 작가가 그리고 있는 지옥은 불구덩이에서 사람들이 고통받는 곳이 아니라 생각만 하면 뭐든 만들어지는 아쉬울 것이 없는 곳이다. 다만 자신의 주장만 내세우는 탓에 부딪히고 다른 이들과 함께할 수 없어 한없이 고립되는 곳이다.

버스에서 내린 곳은 천국의 언저리이며 아득히 먼 저쪽 거대한 구름 내지 산맥 같은 것이 눈에 띄고 그 틈으로 가파른 숲과 깊이 패인 골짜기, 까마득한 산꼭대기에 자리 잡은 고산 도시들의 형체가 언뜻언뜻 보인다. 천국 주민들은 산맥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살고 있다고 한다.

버스에 탄 승객들은 모두가 유령이었다. 빛 한복판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는 그들은 투명했고, 나무 그늘 속에 들어가 있을 때는 불투명한 부분이 생겨 얼룩얼룩하게 보였다. 그들이 밟고 가는 풀이 휘어지지 않고 풀잎에 맺힌 이슬 한 방울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그들을 맞으러 온 이들을 본다. 그들은 워낙 빛이 나서 아주 멀리서부터 눈에 띄었다. 강인한 발로 촉촉한 땅을 밟을 때마다 땅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 견고한 영들(Solid People)은 우리 유령들 중 누구와 동행할 것인지 미리 정해 놓은 것처럼 단호하게 움직였다.

지옥에서 올라온 유령들은 여러모로 다양하며 그들을 맞으러 온 영들과의 에피소드들이 책의 나머지 부분들을 장식하고 있다. 자신의 투명하고 희미한 모습을 감당할 수 없어서 기겁하며 버스로 돌아가는 유령, 생전의 모습과 완전히 달라졌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하던 대로 자신을 맞으러 온 이를 유혹하려 들다 여의치 않자 분개하며 버스로 돌아가는 유령, 세상에서의 지명도와 성공에 아직도 연연하고 천국에서도 자신을 드러내고 유명해질 수 있기를 바라는, 그럴 수 없다면 있을 이유가 없다고 말하는 화가 유령 등등...

주인공에게 다가온 영은 그가 평소 신뢰하던 조지 맥도널드였다. 그의 작품 「판테스티스」(Phantastes)를 샀던 순간이 마치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처음 본 순간과 같았다는 것, 그때부터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그는 삶의 스승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이 얼마나 오랫동안 상상력의 영역에만 제한되어 있었는지도 고백하기 시작했다. 

스승(Teacher)은 ‘레프리제리움(Refrigerium)’에 대해 묻는다. ‘원기를 회복하는 곳(place of refreshment)’이라는 뜻으로, 로마인들은 죽은 이의 무덤에서 음식을 나눠먹으며, 죽은 이가 ‘레프리제리움’에 가기를 빌었다. 지금 그들이 만난 곳은 저주받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휴가 즉 '소풍'이라고 한다. 

“회색 도시를 버리고 떠난 사람에게 그곳은 지옥이 아닐세. 그 사람들에게는 연옥인 셈이지. 그리고 이 나라도 ‘천국’으로 부르지 않는 게 좋겠네. 자네도 알겠지만 여긴 깊은 천국이 아니거든. 그보다 여긴 ‘생명의 그늘이 드리운 골짜기’라고 할 수 있네. 반면 저 아래 도시의 서글픈 거리들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할 수 있지. 물론 계속 거기 머무는 사람들에게는 처음부터 ‘지옥’이지만.”

스승은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밖에 없다고 한다. 하나님께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하는 인간들과, 하나님의 입에서 끝내 ‘그래, 네 뜻대로 되게 해 주마’라는 말을 듣고야 마는 인간들. 지옥에 있는 자들은 전부 자기가 선택해서 거기 있게 된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무엇인가? 천국 대신 세상을 선택한 자는 세상이 처음부터 지옥의 한 구역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며 세상을 천국 다음으로 생각하는 자는 세상이 애초부터 천국의 일부였음을 알게 될 것이다.

저자는 「천국과 지옥의 이혼」은 판타지라는 사실을 명심해 달라고 부탁한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상황들은 상상을 동원해서 가정한 것들이다. 사후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인지 추측하거나 어림짐작해 본 결과라고도 할 수 없는 순전한 상상의 산물이라고 강조한다. 

어설픈 독자의 경우 이 책을 읽으며 마치 연옥의 존재를 참인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 이런 글이 있다.

“꿈이라구요? 그렇다면…, 그렇다면, 제가 정말로 여기 있는 게 아니란 말씀입니까, 선생님?”

사람이 흔히 꾸는 꿈은 현실성이 없다는 특징이 있다. 이 책은 자신의 주장을 누군가에게 설득하려는 목적으로 쓴 논문이 아니라 깨고 나면 잊혀지는 꿈처럼 가벼운 것으로 치부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C.S.루이스가 이 책을 쓴 목적은 이 세상에서 지옥으로 향하는 이들을 천국으로 방향을 바꾸게 할 의도라고 생각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천국과 지옥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곳이다.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천국보다 이 세상이 더 크게 보이는 사람에게는 지옥의 한 언저리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천국을 상위 개념으로 삼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도 천국의 일부가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