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장례와 관련해 떠오르는 단상 23
죽음, 장례와 관련해 떠오르는 단상 23
  • 안양준
  • 승인 2024.01.03 10: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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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러스킨의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속에서

자신이 쓴 글이 누군가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면 그 삶은 성공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존 러스킨이 쓴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라는 책은 인도의 위대한 지도자였던 간디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간디는 수필집에서 “그의 책을 읽기 시작한 이후로 도저히 내려 놓을 수가 없었다. … 러스킨의 가르침에 따라 내 삶을 바꾸기로 결심했다.”라고 소감을 적었다.

이 책은 런던의 부요한 상인의 집에서 태어나 옥스퍼드를 졸업하고 예술 평단에서 명성을 떨치던 불혹의 나이를 넘긴 러스킨이 당시 사회경제적 모순을 목도한 후 사회사상가로 전향하여 쓴 것이다.

러스킨은 사람들이 군인을 칭송하는 이유는 국가 안보를 위해 목숨을 내놓기 때문이고, 법관을 존경하는 이유는 어떤 대가가 주어지더라도 공정한 판결을 내릴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 상인이 낮은 평판을 받는 이유는 그들이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움직이는 까닭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만약 뼈 없는 인간에 대해 가정한다면 체조 선수가 몸을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뜨리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현대경제학은 뼈 없는 아니 영혼 없는 인간을 바탕으로 세워졌다. ‘최대 이윤과 최소 분배’를 추구하는 현대경제학을 영혼없는 인간이라 한 것이다.

화폐를 부의 기준으로 삼는 사고방식이 상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부’의 이름 뒤에 감추어진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은 ‘타인에 대한 지배력’이다. 경제학에서는 부자가 되기 위해 본인이 ‘절대적으로’ 돈을 많이 버는 기술도 필요할 뿐 아니라, 동시에 타인이 ‘상대적으로’ 돈을 적게 벌도록 조장하는 기술도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위치에 서서 불평등의 간격을 최대한 벌려라.”

이러한 상황에서 러스킨은 ‘부에 대한 합당한 정의’와 ‘정직의 회복’을 주장한다.

빵 한 조각 남은 경우 어머니와 자녀의 이해관계는 반드시 ‘적대적’인가? 힘센 어머니가 빵을 쟁취하는 것이 당연한가? 이럴 경우 대부분의 어머니는 자녀들을 위해 빵을 양보한다.

위의 예처럼 가족 간의 헌신적 희생과 사랑은 아니더라도 사회의 도덕적 수준을 가늠하는 기준으로서 정직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상실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콘 힐 매거진>에 연재된 네 권의 논문을 묶어 출판한 것으로 당시 독자들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음에도 러스킨은 자신의 글에 대한 상당한 자부심을 표시한다.

책 중에 이런 글이 있다.

“최근 캘리포니아로 향하다가 난파된 선박에 타고 있던 한 승객이 200파운드의 금괴가 든 전대를 몸에 두른 상태로 해저 바닥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승객이 금괴를 소유했다고 볼 수 있을까, 아니면 금괴가 승객을 소유했다고 볼 수 있을까?”

러스킨은 200년전 인물이다. 그때에도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 신기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는 너무 흔한 것이라 신기하다.

책의 뒷면에 그의 생애에 대해 적고 있는데 그가 청혼했을 때 사회주의자, 무신론자라는 이유로 거절 당했다는 글을 보며 나도 모르게 쓴 웃음을 짓고 말았다.

러스킨의 책 외에도 「성경적 경제학」이라는 책이 있다.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을 쉽게 풀어 쓴 책으로 구약의 ‘토지와 희년’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헨리 조지의 사상을 우리나라에 전하려 애쓴 인물이 예수원의 대천덕 신부이다.

그가 생전에 자주 하던 말이 한 사람을 도울 경우 선행에 대해 칭찬을 받지만 악한 구조 자체를 바꾸려는 시도는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게 한다는 것이다.

물론 러스킨이나 대천덕 신부 같은 분들이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경우 ‘올바른 기독교 장례문화 정착’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사역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상조를 운영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 현장에 뛰어들지 않고 문화를 바꾼다는 말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올바른 기독교 장례문화 정착은 여러 부분이 복합적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중 하나는 현장에서 자주 접했던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 쉽게 표현하면 기독교가 일반인들보다 돈을 더 밝힌다는 말이 너무 싫었고 어떻게든 이런 인식을 없애고 싶었다.

러스킨의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라는 제목은 마태복음 20장 13~14절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는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나는 경제학을 논리적으로 내세울 자신도, 그럴 생각도 없다. 하지만 다음 구절인 15절의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는 말씀을 인용하여 내가 취할 수 있는 이익을 내 임의로 다른 이에게 나눠주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삶 속에서 이런 방식을 취한다면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것이라는 생각에서 그런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조금만 줄인다면 의외로 선한 일을 많이 할 수 있다는, 오래지 않은 경험에서 깨달은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실제 삶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어지는 진리이다.

러스킨이 삶과 죽음과 관련한 인과응보의 측면에서 발레리우스 푸블리콜라의 마지막 가는 길에 바쳐졌던 리비우스의 헌정 중에 “그의 장례식은 국비보조로 치러졌다”는 문구가 어느 누구의 묘비명으로 사용되더라도 그의 생애가 불명예스럽게 결론지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 부분이 있다.

장례식에 국비보조가 해당되는 경우가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모든 이의 장례가 국비보조로 치러지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국비보조로 치러지는 경우 나라가 국민의 장례에 무관심하지 않았다는 것, 그 속에 포함되었기에 명예롭게 느껴야 한다는 의미라면 한국의 장례문화도 국가의 지원폭이 좀더 넓어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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