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장례와 관련해 떠오르는 단상 22
죽음, 장례와 관련해 떠오르는 단상 22
  • 안양준
  • 승인 2023.12.27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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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 슈사쿠의 「침묵」 속에서

로마 교황청에 포르투갈 예수회에서 일본에 파견한 페레이라 신부가 배교했다는 보고서가 올라왔다. 신학적 재능이 뛰어난 그는 일본에 체류한지 33년이 지나는 동안 늘 불굴의 신념이 넘쳤기에 그의 배교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가톨릭을 박해하는 정책으로 전환한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뒤를 이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역시 그와 같은 일환으로 모든 가톨릭 선교사 70인에 대한 해외 추방령을 내렸지만 차마 신도들을 버리고 갈 수 없어 37명의 사제가 남았고 페레이라도 이들 중 한 명이었다.

나가사키 행정관 다케나카 우네메는 고문으로 배교를 조장했지만 실패했고 그로 인해 신도들이 용기를 얻게 되었다는 편지를 쓴 페레이라 신부가 고문에 굴복했다고는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다.

페레이라 신부의 제자였던 포르투갈의 젊은 사제들이 사건 진상을 위해 일본행을 원했지만 극히 위험한 지역에 파송을 쉽게 허용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동양의 가장 좋은 선교지인 일본을 포기할 수도, 신앙의 지도자를 잃고 절망하는 신도들을 방관할 수도 없어 우여곡절 끝에 도항(渡航)을 허가한다.

마카오에 도착하여 선교학원을 운영하는 발리냐노 신부를 통해 이노우에라는 이름을 듣게 된다. 그는 뱀처럼 교활하여 고문이나 협박에도 굴복하지 않던 신도들을 배교시킨 위험 인물이다.

일본에 들어가기 위해 가이드 역할을 해줄 일본인 기치지로를 만난다. 그는 겁쟁이며 지독한 술꾼이었다, 그럼에도 달리 방법이 없기에 그에게 운명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를 통해 도모기라는 어촌에 도착하였는데 주민 대부분이 세례를 받은 적이 있지만 가톨릭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에 두려워 한다.

당시 사제가 거처하는 장소를 신고하면 은 300냥, 수도사를 신고하면 은 200냥, 어떤 신도라도 발견만 하면 은 100냥의 상금이 지급되기에 가난한 백성에게는 엄청난 유혹이었을 것이다

기치지로는 배교의 경험이 있는 가톨릭 신도였다. 8년 전 형과 누이가 그리스도의 얼굴을 그려진 성화를 밟으라는 명령을 거절함으로 화형에 처해질 때 기치지로는 성화를 밟고 풀려났으며 이후 마을을 떠나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기치지로가 마치 영웅처럼 부락민에게 환대를 받으며 자랑스럽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에게 고해를 권하자 지난날의 죄를 모두 자백한다. 성격은 선량하지만, 선천적으로 겁이 많은 기치지로는 용기를 가질 수 없는 인물이다. 

얼마후 관리들이 들이닥치고 급하게 피하였지만 ‘영감님’이라고 불리는 오인이 밧줄에 묶인 채 나타난다. 누가 고소한 것일까?

심문 과정에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게 바라보는, 이 정도까지 자신의 상상을 뒤엎는 상대를 본 적이 없는, 발리냐노 신부가 악마라고 말하며 수많은 선교사들을 배교하게 만든 이노우에는 음험한 인상일 거라 생각해 왔지만 눈앞에는 사물에 대한 이해심이 넓을 것 같은 온화한 인물이 앉아 있었다.

이노우에와 로드리고 신부의 대화 내용이다.

“히라도의 영주 마쓰우라 다카노부 공에게는 네 사람의 소실이 있었는데, 이들이 서로 질투하여 싸움이 그치질 않았소. 영주는 견딜 수 없어 결국 그들을 모두 추방해 버렸소. 아니, 일생 독신으로 지낸 신부에게 이런 이야기는 금물이겠군요.”
“그 영주님은 매우 현명한 일을 하셨습니다.”

격의 없이 말하는 이노우에의 말투에 신부도 결국 긴장을 풀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오? 그렇다면 안심했소. 우리 일본은 바로 이 마쓰우라 영주와 같은 이치요. 에스파냐,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 제각기 이름 있는 여자들이 매일 밤 잠자리에서 시중을 들 때마다 일본이라는 남자의 귀에다 서로 악담을 들려주기 때문에….”

이노우에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차츰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노우에가 결코 거짓말을 늘어놓고 있지 않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일본을 둘러싸고, 신교 국가인 영국과 네덜란드가 구교 국가인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진출을 원하지 않아 자주 막부나 관리들에게 참언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일본에 복음이 막히게 된 원인이다. 신교와 구교의 분쟁이 구실이 된 것이다. 물론 그들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지만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한 종교 분쟁에도 문제가 있는 것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격이 뚜렷하며 그들의 논리가 복잡하기에 짧게 요약하기 쉽지 않은 작품이다. 무엇보다 등장 인물이 실제는 아니지만 역사 속 인물을 약간 변형한 논픽션에 가깝기에 더욱 설득력이 있게 느껴진다.

“신부님, 저희들은 나쁜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요.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런 고통을 주시는지요?”

겁쟁이의 한탄처럼 들리는 기지치로의 말이 어째서 예리한 바늘이 되어 가슴을 찌르는 것인가? 기치지로가 말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침묵이다. 박해가 시작되고 일본 땅에 수많은 신도들의 신음으로 가득 차고 사제의 붉은 피가 흐르는데, 하나님은 침묵하신다. 

“농민들은 불쌍한 자들이오. 그런데 저들을 살리느냐 죽이느냐 하는 것은 신부 당신의 마음가짐에 따라서….”

신부는 그 말의 의미를 잘 알 수 없었지만, 이 교활한 노인이 자신을 함정에 몰아넣으려고 한다는 점만은 그의 표정에서 느낄 수 있었다.

“농민들은 그들 자신의 머리로는 생각할 능력이 없소. 그래서 말인데, 당신이 단 한 마디만 한다면.”
“무슨 말을 합니까?”
“배교하라고 말이오.”

결국 이 소설의 발단인 페레이라 신부와의 만남이 있고 그가 배교하게 된 경위를 듣고 자신도 배교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 「침묵」이라는 소설이다. 물론 어떤한 변명으로도 배교는 성립될 수 없다. 그럼에도 배교하지 않을 자신감을 드러낼 수 없기에 감히 해답을 제시할 용기를 낼 수는 없다. 그것은 이론이 아닌 행동인 까닭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끝까지 지켜주시기만,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주시기만 간절히 바랄 뿐이다. 

결국 기치지로가 주범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악인이다. 자신의 약함을 그냥 놔두지 않는 세상이 더 악하게 여겨지겠지만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악에 동조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죄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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