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쌍히 여김 받는 삶
불쌍히 여김 받는 삶
  • 이구영
  • 승인 2024.01.05 10: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인’ 이라 이름 하는 성에 들어가셔서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 내신 적이 있으십니다.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울고 있는 여인을 향하여 울지 말라 하시고 죽은 아들을 일으키셨습니다.

왜 하필 그 과부를 불쌍히 여기셨을까요? 누군가 이런 질문을 한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어요? 과부이기 때문에 불쌍하고, 고아이기 때문에 불쌍하고, 장애인이기 때문에 불쌍하고, 가난하기 때문에 불쌍한가요? 그렇다면 돈이 있는 사람은 불쌍하지 않은가요? 돈은 있지만 자식 때문에, 남편 때문에, 아내 때문에 속 썩고 자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돈이 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불쌍하지 않을까요? 또, 육신이 건강한 사람이라고 다 행복한가요?

반면, 육신의 장애는 가지고 있지만 오장육부가 튼튼한 분이 계십니다. 그런데 스트레스와 과로에 살면서 오장육부 어디 하나 내세울 것 없이 건강검진을 수차례 받으면, 몇 페이지에 걸쳐서 고치고 수리해야 될 부분들을 지적 받는 분들도 있습니다.

[눅 7: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누가라는 설교자는 이 여인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한 단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당시 여자들은 권력도 힘도 없었습니다. 아들이 있어야 했고 남편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는 남편이 없었습니다. 아들도 없습니다. 장례가 나도 도와 줄이 애도할 이 없는 쓸쓸한 장례식이 예상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성의 많은 사람이 장례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참 열심히 산 사람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없지만, 약하지만 기죽지 않고 핑계대지 않고 오랜 세월을 이웃을 위한 따뜻한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힘듭니다. 벅찬 날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참 열심히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왔는데 남은 아들마저 죽을 때 이 여인은 절망하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를 만나십니다. 그리고는 그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과부라서 불쌍하다가 보다는 혼자 된 몸으로 참 열심히 살아온 그의 삶을 위로해 주시고 싶으셨습니다.

여기에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길이 있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삶... 그런 사람이 현실적 어려움에 처할 때 주님은 다가오십니다.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리고 해결해 주십니다. 갖추어지지 않은 인생, 밀려나는 삶 일지라도 최선을 다해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가운데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되길 기도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