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세상을 녹이는
추운 세상을 녹이는
  • 서정남
  • 승인 2023.12.19 09: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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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병과 캔을 다용도실에 모았더니 부피가 커져서 이젠 공간을 비워내야 할 것 같다. 큰 가방 두개에 담고 Recycling machine 으로 향했다. 지난 달에 무겁게 들고갔다가 기계 고장으로 헛걸음 했으니 불안 심리가 있긴 하다. 운동과 소득의 일거양득이니 만보기를 켜고 걸었다. 중도에서 all black lady가 저만큼에서 오고 있다. 검은 히잡에다 검은 우산까지 쓴 실루엣이 시각적으로 유쾌하지가 않다. 찌는 더위라서 파라솔이 생각나지만 검정우산은 좀 그렇다... 여인이 내게로 점 점 가까이 온다. 뭐라고 말을 건넨다. 못들은 척 지나려는데 machine이 고장이라고 알려준다. 자기도 헛걸음하고 오는 길이라고 한다.

아~이 더위에 에너지 손실을 절반으로 줄여주다니 고마움과 함께 이내 미안함이 차오른다. 방향을 되돌려 그녀와 나란히 걸었다. 자기는 우크라이나 인이라고 한다. 전쟁에 대해 묻고 싶지만 왠지 오늘은 아픈이야기는 하고 싶지가 않았다. 인사하고 헤어질 때 그녀는 "감사합니다"로 분명히 인사하였다.

W supermarket troly가 길에 내팽개쳐 져 있다. W supermarket은 우리 아파트 1층이다. 잘됐다. 빈병을 troly에 담고선 가까운 재활용센타를 검색하고 방향을 틀었다. 도착한 곳은 dairy이고 병 1개당 10센트에 사주는 것이다. 150개가 캐시로 15불로 전환된다. troly가 날 도왔으니 매장까지 갖다 주자고 맘 먹었는데 경사길의 troly 무게는 상당한 노동이었다. 길가에 정리된 troly 집단이 있어서 이쯤에서 놓아 주어도 될거 같아 그들 뒤에 끼워넣었다.

갈증이 난다. 시원한 음료수가 생각나지만 고생해서 15불 번 것을 생각하니 절반이나 뚝 떨어져 나간다는게 용납이 안된다. 그래서 인생은 이것저것 다 경험을 해보아야 알게 되나보다. 6300보를 걸었다. 나에게 세상을 폭넓게 보라고 주님이 친절하게 훈련시키셨는데 가장 고난도가 재정훈련이었다. 그로인해 뻣뻣하던 허리는 위 아래로 많이 유연해졌다는 자가진단이다. 지금은 그 시간에 감사한다. 그 파장은 가족 전원에게 미쳤고 자녀들도 체질과 시각이 바뀐 건 사실이다.

딸이 지난 주에 벙개로 시드니를 닷새간 다녀갔다. 친정이 호주로 이주한 뒤, 첫 걸음이다. 쇼핑센타에 갔다가 올라오더니 "엄마, 쇼핑센타에서 이민자 노동자들을 보는데 왜 그리 가슴이 짠하지?" 나는 속으로 감사가 나왔다. 수년 전에 아들이 한국에서 근무할 때였다. 추운겨울 새벽에 내가 지하철 역까지 픽업해 주느라 세브란스 병원 앞을 지나는데 그 푸르름의 새벽 녘에 청소부가 무겁게 쌓인 눈을 삽으로 치우고 있었다. 아들이 나즈막이 혼잣말로 "아 저 아저씨 너무 불쌍하다." 나는 속으로 감사가 나왔다. 자녀들의 미래를 나는 걱정 않는다. 그들의 눈에 낮은울타리가 보였으니 타인의 필요를 채워 줄 이타적인 적용은 언젠가는 해내리라 믿기 때문이다.

어제는 문화교실의 고 한상대 교수님 3주기 추모시간을 가졌다. 박화서 원장님의 남편이 걸어온 발자취를 듣는데 여러 번 울컥하였다. 한 교수님께서는 "호주 여기가 내가 살 곳이다"고 하셨다고 한다. 한국의 특수계층과 특수환경을 뒤로하고 호주의 교포들에게 자신의 지식과 재능을 나누고 호주 국가에는 Korea와 한국어와 바둑까지 알리는 이타적인 삶을 살다 가셨다. 공동체는 사람이 모인 곳이기에 견해차도 생기고 안티까지도 품고 가자면 복음만 빠졌지 목회와도 같다. 그것을 대가 없이 헌신하심은 오직 교민들의 삶의 질을 높여 주기 위함이었으리라.

바울이 생각난다. 최고 환경과 최고 학문도 비슷하고 예수에 대한 오해의 시간들도 비슷하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 아시아로 로마로 유럽으로 복음 전령자의 삶을 살았다. 한상대교수도 시드니 연합교회 지교회를 캔버라에 창립하였고 2인 성가대와 목회자가 공석일 때는 단상 아래서 설교도 하신 적이 있다. 사모님은 반주와 연합 교단에 교회를 대표하는 총무 집사도 하셨다. 성악을 전공한 한 교수님은 교회들의 요청에 따라 특별찬양도 매번 순종하셨다. 재정과 재능을 드린 평신도 사역자의 귀한 시간을 들으며 한 영혼도 놓지 않으시고 성실히 인도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또다시 보게 된다.

2023년의 말이다.

이어지는 2024년의 새 캔바스에 이제 따뜻한 그림을 그려보자.

이타적인 삶으로 추운 세상을 녹여주는 한 몫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 중 하나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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