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장례와 관련해 떠오르는 단상 15
죽음, 장례와 관련해 떠오르는 단상 15
  • 안양준
  • 승인 2023.11.08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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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속에서

「보바리 부인」은 1848년 프랑스 루앙에서 20km떨어진 ‘리’라는 마을에서 드라마르라는 의사의 부인 델핀느가 음독자살한 사건을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사실주의 작가라는 명성답게 세밀하게 쓴 실화 바탕의 소설이다.

한 사람의 죽음을 두고 그에 대한 평가를 내릴 경우 제각기 다른 평가를 내릴 것이다. 이는 그에 대해 자신이 갖는 추억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인생 가운데 어느 한 시점을 바라본 것 때문에 아니면 만나는 사람마다 대하는 모습이 달라지는 까닭에 누구의 평가가 옳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소설을 읽고 한 동안 불편함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소설은 열댓 살 정도의 시골 아이가 전학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분명 모범생이지만 무언가 부족해 보이는 아이의 이름은 ‘샤를르 보바리’이다. 의사가 되기를 원하는 부모의 뜻을 따라 시험에 합격하고 토스트라는 곳에서 개업한다.

이후 갖춘 미망인과 결혼하는데 의부증과 잔소리가 심한 여인으로 그나마 공증인이 위탁금 전부를 갖고 도망치는 바람에 어려움에 처하고 불과 1주일 만에 죽고 만다.

그때 샤를르는 환자의 딸 엠마에게 마음을 두고 있던 상태였다. 아름다운 눈을 가진 여인을 만나고는 1주일에 두 번씩 왕진을 가면서도 왜 기쁜지 생각도 못하는 샤를르였다.

엠마도 결혼하기 전에는 샤를르와 연애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당연히 았어야 할 행복이 없음을 깨닫고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열세 살 때 아버지는 엠마를 수녀원에 데려다 놓았다. 그녀는 교리 문답을 열심히 외었고 보좌 신부가 힘든 질문을 할 때도 맡아 놓고 대답했다. 그녀는 사물에서 자기 이익을 끄집어내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고 마음 속에 필요없다고 생각하면 모두 버렸다. 엠마는 예술적이라기보다 감상적인 기질이고, 풍경을 찾지 않고 정서를 구하는 성격이었다.

남자란 모든 것을 알고, 갖가지 일에 뛰어나며, 정열의 힘과 세련된 생활과 모든 신비로운 세계로 안내해 주는 안내자여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이 남자는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고,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 희망도 없다. 그럼에도 아내가 행복하다고 믿고 있다. 그런 남편의 침착성, 우둔함, 자신이 남편에게 주는 행복까지 원망스러웠다.

그러다가 후작을 수술한 것 때문에 무도회에 초대되었고 이를 계기로 무도회를 회상하는 것이 하나의 일과처럼 되었다. 엠마는 멋을 부려 남편을 기쁘게 하고 싶었지만 샤를르는 그런 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남편이 유명해지기를 바랐지만 도무지 야심도 없었다.

어느날 로돌프 블랑제라는 인물이 병원에 왔다가 엠마를 보았다. 그는 과격한 성격에 머리는 예민했고, 여자 관계가 무척 많아 그 방면에는 지식이 상당했다.

‘남편은 그다지 영리하지 않더군. 그 아내는 싫증나 있는 게 뻔해. 가엾어라! 도마 위의 잉어가 물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그 여자는 사랑을 동경하고 있음에 틀림없어. 두어 마디 달콤한 말만 해주면, 틀림없이 넘어 온다! 그런데 나중에 떼어버릴 때는 어떻게 한다?’

결국 그의 계획에 따라 엠마는 그를 사랑하게 되었고 사치스러워졌으며 그녀의 몸가짐은 무섭게 변화되었다. 꿈에 부풀어 둘이 함께 여행을 떠나자고 할 때 그는 갖가지 핑계를 대고 떠나 버린다. 충격으로 인해 오랜 시간 중병을 앓던 엠마는 갑작스럽게 끝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몰입하는 체험을 하고 성녀가 되고 싶어 자선을 베푸는 데 온 힘을 기울인다. 

그러던 어느날 신부의 권고를 따라 샤를르와 엠마가 극장을 간다. 그곳에서 자신을 연모하던 서기 레옹을 만난다. 그의 수줍어하는 태도를 보고 로돌프의 대담성보다 더 위험하다는 막연한 공포에 사로잡힌다. 

피아노 레슨을 핑계로 1주일에 한 번씩 레옹을 만날 수 있는 허락을 얻어낸다. 이후 그녀의 생활은 온통 거짓말투성이다. 또한 밀회의 날은 축제일이었다. 항상 밀회의 날이 멋지기를 바랐고 거의 매번 엠마가 비용을 부담하게 되었다. 

누군가 레옹의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내어 ‘아들이 어떤 유부녀에게 빠져 있다’고 경고한다. 어머니의 말을 듣고는 엠마와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얼마 후에 서기장이 될 예정이기도 하였다. 엠마가 흐느껴 울면 귀찮은 생각이 들고 사랑의 속삭임은 소음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지체없이 24시간 내에 총액 8천 프랑을 지불할 것’ 그리고 다음에는, ‘모든 법적 조치, 특히 동산의 차압에 의해 강제 집행함’이라는 통보를 받게 된다.

레옹을 찾아가 차압당한 얘기를 하고 딱한 처지를 설명해도 돈을 빌리지 못했다는 말만 듣고 돌아온다. 로돌프를 찾아가서 돈을 빌려달라고 사정하지만 그만한 돈이 없다고 하고 결국 포기한다. 그렇게 집에 돌아와 비소 한 줌을 입에 털어 넣는다.

모든 것이 끝났다. 수많은 배반과 천했던 행위와, 자기를 괴롭혔던 그 많은 욕망이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이제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다.

고통 속에서 사제의 목에 걸려 있는 보랏빛 영대를 보더니 갑자기 기쁨의 미소를 지으며 꺼져 가는 힘을 다해 그리스도상에 열렬한 키스를 퍼붓는다, 신부는 ‘천주께서 불쌍히 여기소서. 용서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와 함께 종부성사를 시작한다. 

장례식 때 로돌프는 기분 전환으로 온종일 숲속을 돌아다니며 사냥을 한 끝에 지금은 집에서 편안히 잠들어 있었고 레옹도 그 도시에서 잘 자고 있었다고 소설은 밝히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사랑의 방식이 서툰 남편의 문제인가? 사랑을 좇는 여인의 욕망이 문제인가? 아니면 하필 좋지 않은 이들을 만난 것이 문제인가?

한 사람의 인생을 평가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구나 해피 엔딩을 꿈꾸지만 그렇지 못한 인생도 많고 무엇을 꼭 집어 잘못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한 때는 수녀원에서 생활했고 모든 이 중에서도 부각될 정도로 총명했던 소녀의 종국이 이처럼 전락하게 된 것이 마음 아플 뿐이다.

소설 속에서는 엠마와 레옹이 만나기 편한 장소로 그려지는 교회가 좀더 신앙적으로 붙잡아줄 수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느낀다. 기독교 장례의 경우 끝까지 신앙을 지키고 임종하신 분들을 대상으로 하기에 보바리 부인과 같은 이를 만나는 일이 없다. 그렇기에 자기 울타리 안의 양떼를 잘 보호할 책임이 교회에 있음을 더욱 인식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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