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장례와 관련해 떠오르는 단상 14
죽음, 장례와 관련해 떠오르는 단상 14
  • 안양준
  • 승인 2023.11.01 07: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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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인물한국사 주기철」 속에서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히 12:1)

신앙생활을 하며 힘들 때마다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앞서 신앙의 길을 걸어간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모범답안과 같은 삶을 살다간 이를 찾는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작업이다. 그런 면에서 주기철 목사님(이하 주기철)은 롤 모델의 역할을 감당한 분이라 할 수 있다.

일제 식민 치하에서 독립투쟁을 하다가 목숨을 잃은 우국지사가 많지만 철저하게 신앙으로만 순교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주기철은 철저한 보수 신앙인이다. 심지어 민족운동을 표방한 인사들의 교회 출입까지 막았던 신앙지상주의자였다. 1940년에는 창씨개명도 했다. 그는 일제와 부딪힐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단 하나님을 믿는 것, 성경에 기록된 대로 크리스찬이 걸어야 하는 길을 걸었기에 공격적 자세를 취하지 않았음에도 상대는 강력한 도전으로 느끼는 것이다.

이승훈이 정주에 오산학교를 창설한 것은 1907년 12월 24일이었고 1912년 춘원 이광수가 오산학교를 소개하는 전국 순회강연 도중 주기철이 있던 웅천에 들러 기독교 정신의 교육이념을 말할 때 크게 자극을 받았다.

이름도 기복에서 기철로 바꾸었는데 ‘기독교를 철저히 지킨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오산학교에서 이승훈과 조만식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헐벗고 굶주리는 백성을 살리는 길, 그 길을 위해서 일하겠습니다.” 주기철이 오산을 떠날 때 조만식에게 한 말이었다.

그후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하였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목사가 될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1년이 못되어 그만두게 되는데 지병인 안질 때문이었다. 그것이 그의 ‘가시’였고 생애에 결정적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그의 눈은 볼 것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4년 반이라는 시간은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그때 신앙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두 사람이 이기선과 김익두이다. 이기선을 통해 성경중심적인 보수주의 신앙에 매료되었고 한국교회 희대의 부흥사인 김익두의 마산 집회는 성령의 불길로 영적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1922년 3월, 25세의 나이로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925년에 졸업하였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은 기독교 타도의 일환으로 신문에 선교사의 비행을 폭로하는 글들을 계속 실었다. 그런 중에 여운형은 승동교회 전도사로, 이동휘는 함경도 순회 전도사로 활동하는 그들을 교회가 막아주는 우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첫 목회지였던 부산 초량교회에서 우선적으로 한 일은 교회의 정치적 요소를 숙정하는 일이었다. 교회는 종교적 소임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이다.

1931년 6월 마산 문창교회로 가게 되는데 당시 한국교회는 사회운동으로 방향 조정(심훈의 「상록수」를 예로 들 수 있다)을 하고, 이용도, 백남주, 황국주 등의 신령 운동이 급속히 전개되었다. 그러나 주기철은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정로를 선택하였다.

그가 특히 심혈을 기울인 것이 교인들의 장례 문제였다. 그는 상사에 전례없는 목회철학을 갖고 있었는데 초량교회에서는 상사전문위원들을 임명하여 장례를 주관하였고, 문창교회에서는 상여를 마련하여 목회에 ‘죽음’에 대해 큰 관심을 쏟았음을 보여준다.

격랑의 1935년 9월, 총회가 신사참배 문제로 어수선할 때 평양 장로회신학교 사경회 강사로 초빙되어 한 설교 제목이 ‘일사각오’이다. 예수를 따라가는 일사각오, 타인을 위한 일사각오, 부활 진리를 위한 일사각오이다. 성경은 피의 기록이요, 피로 전한 부활의 복음이다.

주기철에게 정신적 영향을 미친 조만식이 마산 문창에 찾아가 평양 산정현 교회로 와주기를 청했고 이를 하나님이 지시하신 길이라 믿고 나선다. 당시 평양 산정현 교회를 지키는 것이 한국교회를 살리는 길이라 생각하고 있었고 주기철 역시 그 길이 무슨 길인 알고 있었다. 

교회에 부임하자 숙정의지를 천명하였는데 ‘세 가지 신앙’이란 설교에서 신앙의 범주에 민족운동. 정치운동을 위해 교회에 들어온 사람, 인격을 높이며 도덕생활을 위해 예수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상관없으니, 이제라도 나가시오”라고 했다. 그리고 “성신을 받으라”는 설교를 하였다. 성령을 통해서만 예수의 교훈대로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국에서 가장 교세가 막강했던 평북노회가 신사참배에 가결하였고 주기철은 신사 불참배로 구속되었다. 네 차례 구속되며 5년 이상의 감옥살이를 하였다. 고문의 아픔이 얼마나 심했는지는 자술 속에서 알 수 있다. 

“인간의 육체라는 것이 그렇게도 아플 수 있는가.”

감옥 안에서 만난 안이숙에게 손가락 회화로 쑥갓을 먹고 싶다고도 했다. 그는 바위가 아니라 바위에 부딪혀 부서지는 파도였다.

“여드레 후에는 아무래도 소천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몸이 부어 올랐습니다. 막내 광조에게는 생명보험을 든 2백원으로 공부를 시키십시오. 어머님께 봉양 잘하여 드리고…. 어머님께는 죄송합니다.”

이것이 오정모 사모에게 보내는 유서였다. 주기철 목사의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졌고 일경의 경계 아래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순서지 하나 없이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그의 순교를 소리높이 찬양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해방 후 이북에서 공산당 고위간부가 오정모 사모를 찾아 금일봉을 주며 반일투사에 대한 감사 표시라 할 때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 목사님은 일본에 항거한 것이 아니라, 다만 성경 진리를 보수하기 위해 마귀를 배격한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덧붙일 말이 무엇이 있을까? 약 5:17에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라는 말씀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똑같이 아픔을 느끼고, 슬픔도 느끼고, 기쁨과 즐거움도 느낀다. 하지만 삶의 모습이 같은 것은 아니다.

똑같은 성경을 읽지만 누구나 주기철 목사님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보려고 애쓰는 것이다. 말씀을 지키려 노력하고, 약해질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죽음을 늘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다. 무엇보다 성령의 인도하시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가 주기철 목사님이 살았던 시대보다 편하다고 생각한다면 지금 우리가 영적으로 얼마나 위험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기를! 안질을 통해 다른 것을 볼 수 있게 하신 주님이 영적 세계를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 눈을 열어 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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