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장례와 관련해 떠오르는 단상 13
죽음, 장례와 관련해 떠오르는 단상 13
  • 안양준
  • 승인 2023.10.25 07: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속에서

이 소설은 이미 죽음으로 이별한 나의 친구들과, 살아 있지만 떨어져 있는 나의 몇몇 친구들에게 바친다.

우리에겐 「상실의 시대」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한국인에게 사랑받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제 <노르웨이의 숲>이란 소설의 마지막 내용이다.

비행기가 함부르크 공항에 착륙하자 기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이 격렬하게 머리 속을 어지럽힌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잃어버린 많은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잃어버린 시간, 죽었거나 또는 사라져 간 사람들, 돌이킬 수 없는 지난 기억들.

기억을 더듬으며 글을 쓸 때 불안한 기분에 휩싸이는 것은 가장 중요한 부분의 기억을 상실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몸 속에 기억의 변두리라 부를 어두운 부분이 있어, 소중한 기억들이 거기에 싸여 부드러운 먼지로 변해 버린 것은 아닌가 하고.

그토록 소중해 보이던 그때의 그녀와 나, 그리고 나의 세계는 모두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

지금의 나로선 그녀의 얼굴을 바로 떠올릴 수조차 없다. 내 기억에 남는 것은 사람 그림자 하나 없는 배경뿐이다. 시간을 들이면 조그맣고 차가운 손, 산뜻하고 곧은 머리결, 부드럽고 동그란 귓불, 바로 밑에 있는 조그마한 검은 점, 겨울이면 자주 걸치고 다니던 우아한 카멜 코트, 언제나 상대의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면서 질문하는 버릇, 이따금 무슨 영문인지 떨리는 듯하던 목소리, 그런 이미지를 하나하나 쌓아 가면 자연스레 그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먼저 옆얼굴이 떠오른다. 그 다음에 그녀는 나를 보며 생긋 웃고, 갸웃이 고개를 기울여 말을 걸고, 내 눈을 들여다본다. 

나의 기억은 그녀가 서 있던 곳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그리고 풍경만이, 그 10월의 초원 풍경만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되풀이되어 머리 속에 떠오른다.

“나를 꼭 기억해 주었으면 해요. 내가 존재해서 이렇게 당신 곁에 있었다는 사실을 언제까지라도 기억해 줄래요?”

‘죽음은 삶의 대극으로서가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당구대 위에 나란히 놓인 빨간색과 하얀색으로 된 네 개의 공 안에도 죽음은 존재해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마치 미세한 티끌처럼 폐 속으로 들이마시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때까지도 나는 죽음이라는 것을 삶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독립적 존재로 파악하고 있었다. 즉 ‘죽음은 언젠가는 확실히 우리들을 그 손아귀에 넣는다. 그러나 거꾸로 말하면, 죽음이 우리들을 잡는 그날까지 우리들은 죽음에 잡히는 일이 없는 것이다’하고….

그것은 나에겐 지극히 당연하고 논리적인 명제로 생각되었다. 삶은 이쪽에 있으며, 죽음은 저쪽에 있다. 나는 이쪽에 있고, 저쪽에는 없다.

그러나 기즈키가 죽은 밤을 경계선으로 하여, 나로선 이제 그런 식으로 단순하게 죽음을 파악할 수 없게 되었다. 죽음은 ‘나’라는 존재 속에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것이며, 그 사실은 제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망각해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열일곱 살의 5월 어느 날 밤 기즈키를 사로잡은 죽음은, 동시에 나를 사로잡기도 했던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죽음은 심각한 사실이었다. 나는 숨막히는 배반성 속에서 끝없는 제자리 걸음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제와서 생각하면 그것은 확실히 기묘한 나날이었다. 삶의 한 복판에서 모든 것이 죽음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실의 시대」에는 유난히 죽음에 대한 묘사가 많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유일한 친구였던 기즈키의 죽음, 기즈키의 애인이었고 그의 죽음 이후 주인공의 사랑하는 여인이 된 나오코의 죽음, 나오코가 어릴 때 자살한 언니의 죽음, 주인공의 여자 친구 미도리의 어머니의 고생스런 죽음, 미도리 아버지의 죽음, 와타나베의 선배 나가사와의 애인 하쓰미의 자살 등…. 

“와타나베 군이 만일 나오코의 죽음에 대해서 무엇인가 아픔 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면, 와타나베는 그 아픔을 앞으로 인생을 꾸려 가는 동안 계속 간직하면 돼요. 그래서 만일 배울 것이 있다면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배워요. ~ 난 와타나베에게 그 말을 하려고 그곳을 나와 일부러 여기까지 온 거예요. 그 먼 길을 그 관 같은 전철을 타고서.”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인생에서 가장 강력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많은 목사님들이 “사람이 죽으면 이미 영혼이 천국에 가셨으니 장례는 그리 중요치 않다”고 하시는 것을 듣게 된다. 하지만 이는 바른 견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믿으면 이미 구원받은 것이지만 세례 예식을 거행하는 것처럼 성도가 죽으면 천국에 가신 것이지만 장례 예식을 진행해야 한다. 무엇보다 남겨진 자들에게 장례는 커다란 교훈을 안겨준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전 7:2)

장례식장에서 배울 점은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된다는 사실이다. 언젠가 나도 이와 같이 된다는 사실을 마음에 두고 사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장례의 경우 어린아이도 입관과 화장의 과정을 지켜보게 한다. 그 이유는 평생 동안 그 기억이 마음 속에 남는 까닭이다.

요단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죽음 이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예표한다고 할 때 여호수아는 ‘예수’를,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는 신약의 성령을, 제사장은 영적 지도자인 목사를 상징한다. 성경은 제사장의 발이 요단에 잠길 때 물이 말랐고, 가운데서 머무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건너고, 마지막으로 제사장이 건널 때 물이 도로 흘러 언덕에 넘쳤다고 한다. 또한 요단 가운데와 길갈에 열두 기념비를 쌓는 것은 후일에 자손이 물을 때 영원히 기념이 되리라고 하셨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죽음은 삶 속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친다. 무엇보다 기독교 장례의 경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목회자의 책임을 고취하며, 전도의 기회로, 자녀들의 신앙 교육까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