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장례와 관련해 떠오르는 단상 17
죽음, 장례와 관련해 떠오르는 단상 17
  • 안양준
  • 승인 2023.11.22 09: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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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속에서

시오노 나나미가 쓴 「로마인 이야기」에는 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에 대한 자료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이 방대하기에 모두 옮길 수 없어 네로 황제의 박해를 중심으로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이때 박해의 배경이 되는 ‘로마인과 유대인’에 관한 기록은 매우 중요하다.

유대 민족이 지배자인 로마에 끈질기게 저항한 역사에 대해 다른 민족은 왜 로마에 저항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로마가 타민족을 지배할 때의 기본 정신은, 플루타르코스가 ‘패자까지도 자신들과 동화한다’고 말한 것처럼 철저한 동화 정책이었다. 그런 까닭에 칼리굴라가 스스로 신이라고 공언하였을 때 다른 민족들은 다신교이기에 신이 하나쯤 늘어난다 해도 문제될 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대 민족이 로마의 동화 정책를 거부한 이유는 그들의 종교인 유대교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에는 유대에서 지배자 로마를 연상시키는 인물이나 물건은 최대한 배제했고 유대 장관과 로마군 병영도 예루살렘이 아니라 카이사레아에 주재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칼리굴라가 황제로 즉위한 후 자신을 신격화할 때 유대 민족은 이를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유대인들은 신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라고 믿고 있다. 그런데 다른 민족도 유대교도가 되어 신의 선택을 받는다면, 유대인은 더 이상 선민이 아니다. 따라서 자기들 내부에서 유대교를 고수하는 데에는 열심이지만, 다른 민족에게 유대교를 포교하는 데에는 열성을 보이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유대인은 아웃사이더이지만 그 자체로 큰 문제는 없다.

이와는 반대로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 것이 기독교다.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면 그냥 내버려둘 수 없는 것도 당연하다. 그들이 믿는 신은 유일신이고, 그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은 참된 종교에 눈을 뜨지 못한 불쌍한 사람이니까, 그 상태에서 구해주는 것이야말로 기독교도의 사명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비기독교도가 보기에는 ‘쓸데없는 참견’이다.

네로 시대에 기독교 공동체는 유대인 사회에 비해 규모도 작고 약체여서, 철저한 박해로 궤멸시켜야 할 정도의 세력은 아니었다. 더구나 유대인은 포파이아 황후라는 보호자를 갖고 있었지만, 기독교도 공동체는 그런 보호자도 갖고 있지 않았다. 이런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로마의 기독교도들은 방화죄를 뒤집어씌우기에 알맞은 상대였다. 

네로가 기독교도를 고발한 이유에는 방화죄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증오한 죄’도 포함되어 있었다. 체포는 일망타진이 아니라 고구마 덩굴을 잡아당기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스스로 기독교도임을 밝힌 몇 사람을 잡아서 고문하여 다른 사람들까지 고발하게 하고, 자백을 끌어낸 뒤 재판에 회부한다. 이 경우, 판결은 재판을 하기 전부터 뻔했다. 물론 사형이다. 체포한 뒤 재판도 하지 않고 처형장으로 보내는 것은 로마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타키투스를 비롯한 역사가들은 아무도 이때 목숨을 잃은 순교자의 수를 기록하지 않았다. 현대의 연구자들이 추산한 결과에 따르면, 순교자의 수는 200명 내지 300명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래도 이만한 수의 사람을 한꺼번에 처형하는 것은 일반 시민의 이목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네로는 이것을 단순한 처형이 아니라 잔혹한 구경거리로 삼을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바티칸에 있었던 경기장이 처형장으로 사용되었다.

일부는 야수의 모피를 뒤집어쓰고 들개 떼에 물려죽었다. 다른 이들은 로마 시대의 일반적인 처형법이었던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 나머지는 밤의 구경거리로 남겨졌다. 땅에 박은 말뚝에 한 사람씩 묶은 다음, 산 채로 불을 붙이는 것이다. 활활 타오르는 인간 기둥들이 관중석에서 마른침을 삼키는 시민들의 얼굴을 비추었다. 

네로도 경기장 안으로 끌어들인 전차 위에서 그 광경을 감상했다. 하지만 수많은 기독교도들이 당한 잔혹한 죽음은 네로가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감정을 시민들의 가슴에 불러일으켰다. 네로의 방화설을 믿지 않았던 타키투스도 이렇게 말했다.

“이들이 더 무거운 죄를 지었다 해도, 처형 방식의 잔혹함은 그것을 보는 시민들의 가슴을 동정심으로 가득 채웠다. 시민들은 알고 있었다. 기독교도라고 불리는 그들에게 그토록 잔혹한 운명을 내린 것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 한 사람의 잔인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임을 알고 있었다.”

시민들이 혐오하는 기독교도를 방화범으로 만들어 자신에 대한 시민들의 의혹을 풀려고 했던 네로의 의도는 완전히 벗나가고 있었다. 네로가 불을 질렀다는 소문은 끈질기게 남게 되었다.

제정 시대만이 아니라 공화정 시대까지 포함하는 로마 역사에서 가장 이름이 알려진 인물은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아니고, 아우구스투스도 아니다. 바로 네로다. 유명할 뿐 아니라, 로마 황제의 대표자처럼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로마 제국이 건재했던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로마가 멸망하고, 세계의 주인공이 기독교도로 바뀐 뒤에 정착한 평가다. 

여기까지가 시오노 나나미가 기록한 기독교 박해에 관한 기록이다. E.H.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는 역사가의 관점에서 쓰여지는 것"이라고 한 것처럼 위의 기록도 시오노 나나미가 바라보는 역사라는 느낌이 들곤 한다.

2000년전 초대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물론 네로가 기독교를 박해한 것은 방화죄를 전가하려는 목적이었을 뿐이고 그런 점에서 수도 로마에만 국한된 것이었다.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매우 억울한 처사 임에는 분명하지만 황제의 신격화에 반대하며 오히려 자신들이 믿는 예수를 신이라고 다른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전도하는 기독교가 로마의 입장에서는 불안 요소일 수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시오노 나나미가 쓴 바에 의하면 기독교인의 순교는 저항할 수 없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재판의 과정없이 사형이요, 기록에는 없지만 배교의 기회조차 없었던 것처럼 보여진다.

그럼에도 초대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남다르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이후에도 오히려 포교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으며, 그런 중에 사도들 대부분이 순교를 당하였음이 전승으로 이어져 온다.

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가 아무리 잔인했다 하더라도 그로 인해 기독교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로마 사회 전반을 조금씩 잠식해 간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당하는 공포스런 결과를 알고 있음에도 그렇게 했음은 그들의 흔적인 카타콤의 모습에서 잘 드러난다.

이후에 기독교가 박해를 받는 것은 30년 뒤인 서기 95년으로 이때도 종교적인 이유보다는 도미티아누스 황제 자신에 대한 시민들의 적개심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기독교도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었다. 계속해서 간간히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이어지다가 서기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로마인이 창설한 인류 공생체의 규칙을 어지럽히려 드는 기독교도”를 제국에서 소탕하기로 결정했을 때 기독교의 최대 수난기가 되었다. 

하지만 서기 313년 기독교도에게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이 수난도 막을 내린다. 황제들 사이의 권력투쟁을 교묘히 이용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기독교는 승리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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