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장례와 관련해 떠오르는 단상 11
죽음, 장례와 관련해 떠오르는 단상 11
  • 안양준
  • 승인 2023.10.11 08: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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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의 「토지」 속에서

간난 할멈의 장례날은 쾌청했다.

나이 어려 굴건제복 대신 천태를 두르고 도포 입은 영만이를 위시하여 두만 아비와 두만이, 최참판댁 사내종들은 두건을 썼고 두만 어미, 계집종들은 먹댕기에 북포치마를 입었다. 바우 할아범 장사에 비하면 여간 융숭하지가 않았다. 음식도 많이 차려 마을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으며 마을 상여를 빌려오긴 했으나 만장이 여러 개 바람에 나부꼈고 자식 없는 종 신분의 일생이니 호상이랄 수는 없지만 윤씨 부인이 죽은 사람을 깍듯이 대접한 만큼 꽤 큰 장례식이었다.

간난 할멈은 살 만큼 살았었고 뜻밖의 죽음이 아니었으므로 그를 위해 뜨겁게 울어줄 사람은 없었으나 그러나 열두 상두꾼이 멘 상여, 상두채에 올라서서 앞소리를 하는 서서방의 가락은 여전히 아낙들을 울려놓았다. 제 설움에 울고 인간사가 서러워 울고 창자를 끊는 것같이 가락과 구절이 굽이쳐 넘어가고 바람에 날리어 흩어지는 상두가에 눈물을 흘린다.

어하넘 어하넘 어나라 남천 어하넘
명정공포 우뇌상에 요령소리 한심허다
멀고먼 황천길을 인지 가면 언제 오리

상여는 개울을 넘을 때 멈추었다. 다리가 아파 못 가겠고 개울을 넘는데 망령이 노자 달란다면서 상여꾼이 제자리 걸음을 한다. 두만네, 두만아비, 봉순네가 상두채에 엽전을 놓아준다.

어하넘 어하넘
어나라 남천 어하넘 
이길을 인지 가면
언제 다시 돌아오리 
활장겉이 굽은 길을
살대겉이 내가 가네 

개울을 넘고 길을 돌면 마을이 사라진다. 길손들이 서서 구경하고 강물 위에 뗏목에서 떡목꾼도 상여를 바라본다. 고개를 넘는다.

북망산천 들어가서 띠잔디를 이불 삼고
쉬포리를 벗을 삼고 가랑비 굵은 비는
시우 섞어 오시는데 어느 누가 날 찾으리
어하넘 어하넘--

만장이 바람에 나부낀다. 오르막길에서 상여는 기울고 갈가마귀가 우짖으며 앞장선다. 미리 간 사토장이는 하관할 자리를 파놓고 상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박경리 씨가 쓴 소설 「토지」 1권에 간난 할멈의 장례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소설 중 하나이기에 굳이 소개할 필요도 없지만 시공간적 배경은 1897~1945년까지 경남 하동 평사리와 간도 용정을 주무대로 하고 있다. 

이미 100년이 넘은 과거 전통 장례에 대한 잔상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움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 소설은 다른 부분은 생략하고 출상 장면만을 다룬다.

굴건제복은 굴건과 제복의 합성어이다. 장례 때 유족들은 굴건제복을 갖추어 입지만 소설 속 영만이는 간난할멈의 친손주가 아니라 자신의 제사를 위해 주인인 윤씨 부인의 도움을 받아 손주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나이가 어려 굴건제복을 갖추지 않고 도포를 입은 것이다. 먹댕기나 북포치마 역시 지금은 사라진 경남 하동 지역에서 장례시 입던 여성 복장이라 할 수 있다.

‘만장’은 죽은 사람을 애도하여 지은 글을 천이나 종이에 적어 깃발처럼 만든 것이다. 

전통장례시 상여가 나갈 때 방상씨가 앞장 선다. 이는 악귀를 몰아내는 것으로 장례 행렬이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후 명정, 영여, 만장, 공포, 운아삽, 상여 순으로 진행된다.

예전 장례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일손을 도왔기 때문에 축제처럼 진행되었고 이는 안성기 주연의 영화 <축제>(이청준 원작 소설)에서 잘 볼 수 있다. 비록 자식없이 종살이하던 간난 할멈이지만 함께 했던 이의 장례를 위해 깍듯이 대접했고 그 죽음이 외롭지 않게 애도 글을 적은 만장도 여러 개 바람에 나부꼈다고 한다.

요즘은 운구 위원이라 불리는 남성 여섯이 짧은 거리를 움직이지만 예전 상여는 멀리 그리고 높이 산기슭에 오르는 경우가 많았다. 더구나 상여 위에 노래부르는 사람까지 있으면 얼마나 무거웠을까? 하지만 상여가 움직일 때 불려지는 상두가 또는 장송곡은 사랑하는 고인을 떠나보내는 이들의 마음을 위로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소설 속 상여는 개울을 넘을 때 멈추었다고 한다. 다리 아파 못 가겠고 망령이 노자 달란다며 제자리 걸음하면 유족들이 상두채에 엽전을 놓아주었다고 한다. 어차피 어려운 살림을 다 아는 처지에 노잣돈을 달라는 행동이 괘씸할 수 있지만 그것이 오랜 세월 내려오는 풍습이었고 어느 한 개인의 주머니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었다.

기독교 장례의 경우 일반 장례보다 경제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선 제사상을 차리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도 제대로 된 유교나 불교식 장례의 경우 제사상을 차리는 것을 당연시하며 첫날 아직 죽음을 인정하지 않을 때 올리는 상식과 입관 후 드리는 성복제와 발인제, 노제 등을 차릴 경우 100만원 가량의 비용이 들고, 입관이나 발인 때 요즘은 못하게 하지만 그럼에도 노잣돈을 요구하는 것이 관례처럼 나타난다.

분명 예전보다 살기 좋아졌다는데 부모에 대한 효가 사라진 건지, 돈 밖에 모르는 물질만능주의가 판치는 세상이라 그런지 서로 도와주고, 함께 슬퍼해주는 모습이 점차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넘어 아픔을 느끼게 된다.

물론 전통장례로 돌아가자는 차원에서 쓰는 글은 결코 아니다. 온전한 기독교 장례문화 정착을 위해 노력해도 버거운 상황에서 생각조차 갖을 마음이 없지만 그나마 따스했던 시절에 대한 기억은 잊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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