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세계성찬주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세계성찬주일’
  • 이정순
  • 승인 2023.10.02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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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성찬주일 안내 포스터(출처 : UMC 웹사이트)

중고등부 시절 부활절이나 성탄절과 같은 특별 절기 때마다 대예배에 참석하여 전 교인과 함께 예배드리곤 했다. 그런데 이런 때는 꼭 성찬 예식을 거행했다. 정확히 일 년에 두 번 드리는 소중한 예식이었다.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가운을 입고 흰 목장갑을 낀 채 의식을 거행했다. 강대상 밑에 준비된 성찬용 테이블 위에는 포도즙과 카스테라가 준비되어 있었고 언제나 흰 천으로 덮여 있었다. 이윽고 엄숙한 기도와 함께 세례받은 사람만 성찬을 받아야 한다는 광고와 함께 성찬 예식은 거룩한 예식으로 진행되었다. 오래전 기억이지만 지금도 생생하다. 그만큼 성찬이 정확히 어떤 의미였는지 잘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일 년에 두 번 거행하는 매우 거룩하고도 특별한 의식으로 내 기억에 확실하게 자리잡은 것이다.

어째서 일 년에 두 번 성찬식을 거행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그후 신학을 공부하면서 개신교 종교개혁이라는 주제와 더불어 알게 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7개의 성사가 대폭 축소되면서 성찬과 세례의식만 남게 되었고, 그나마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하는 개혁교회의 영향으로 매 주일 예배에서 성찬이 빠지게 된 것이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말씀 중심, 경전 중심의 종교로 바뀌게 된 것이다.

한국 개신교는 교파와 관계없이 말씀 중심의 교회, 경전 중심의 교회로 부흥 성장했다. 특히 계절마다 부흥회나 사경회를 개최하여 간절히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자 했다. 여기에 통성기도라는 독특한 형태의 기도가 첨가되어 말씀 중심의 영성은 더 한층 강화될 수 있었다.

하지만 종교적 영성은 경전만 가지고 완성되지 않는다. 한국 기독교의 영성이 형성되는 예배에서 경전이 가장 중요한 위치를 갖는다 하더라도, 다양한 예전적 요소가 사라져 버린다면 그 예배는 진정한 의미의 영성을 형성할 수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예배의 중심인 것은 맞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기독교의 예배가 제대로 드려질 수 없다는 의미이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최초의 교회에서는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서로 교제하며 함께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했다”(행 2:42)고 나와 있다. 성찬이 예배의 일부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초대교회 예배의 원형이 드러나 있는 에베소 교회를 보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했다”(엡5:19)는 구절이 나온다. 예배에 이미 음악적인 요소가 가미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90년대 미국 메가처치에서 유입된 이른바 경배와 찬양이라는 형태의 열린 예배가 많은 교회에서 유행하고 있다. 많은 교회들이 특정 교단에 속해 있음에도 그 교단의 예배의식을 따르지 않고, CCM 위주의 찬양, 통성기도, 설교 등으로 예배를 단순화해서 자유롭게 드리고 있다. 이런 경우 뜨거운 감정은 고조시킬 수 있지만, 예배가 끝난 후 일상생활 속에서 지속되는 영성은 형성되지 못한다. 계속 영적 갈증만이 생기게 되고, 그 결과 비슷한 유형의 예배와 집회에 집착하게 만들뿐이다. 삶의 현장 한가운데서 고투하며 조금씩 뿌리 내리는 영성과는 더 멀어지게 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의 영성형성을 위해 예전을 회복하자는 움직임이 언제부터인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는 루터의 종교개혁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금은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16세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지금은 다양한 전통이 서로 대화하며 공존하는 시대이므로, 한국 개신교의 부족함을 보완한다는 측면에서 예전성의 회복을 고민하자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일부 교회에서 성찬을 다시 강조하기 시작했다. 성찬은 초대교회 시절부터 예배의 중심이었다. 성찬은 예수의 삶과 희생을 기리고 그 의미를 되새기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었다. 즉 성사 중의 가장 중요한 성사였다. 그런데 중세 시대에 들어와 다른 성사들과 함께 여러 미신적 요소들이 가미되면서 비신앙적인 것으로 비판을 받으면서 예배에서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제 시대가 변해서 많은 교회들이 다시 성찬 예식을 예배 때 드리고 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 후예들인 미국 제자들교회처럼 매주 예배 때 성찬식을 행하는 개신교단도 있고, 매월 첫째 주에 성찬식을 행하는 교회들도 많다. 예전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결과이다. 이런 상황에서 매년 10월 첫째 주는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지키는 ‘세계성찬주일’(World Communion Sunday)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최소한 일 년에 한 번만이라도 성찬 예식을 함께 거행함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을 되새기고 하나가 되자는 날이다.

교회 채색창에 묘사된 빵과 포도주(출처: 위키미디어커먼스)

세계성찬주일은 1982년 페루의 수도 리마(Lima)에서 열린 세계 교회 협의회 ‘신앙과 직제위원회’ 총회에서 결정되었다고 한다. 이 모임에서 신학자들은 개신교와 동방정교회 및 가톨릭을 포함한 전 세계의 교회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성만찬 예식서 <세례, 성찬, 목회(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를 내놓았고, 또한 매년 10월 첫째 주일을 세계성찬주일로 지키기로 결의했다. 특히 <리마 문서>, 또는 <BEM 문서>로 불리는 이 성찬 예식서는 전 세계의 교회가 교리와 교파를 초월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성찬을 함께 거행하는 역사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그야말로 동서교회의 분열, 개신교회의 분열을 다시 연합으로 치유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이다.

<세례, 성찬, 목회> 문서에서는 성찬을 구성하는 여러 신학적 요소들을 설명한다. 필자는 그중 성찬의 네 번째 요소인 성도 간의 사귐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것은 성찬의 사회적 의미로서, 성찬을 ‘나눔의 잔치’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즉 <세례, 성찬, 목회>문서는 성찬이 갖는 이런 나눔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성찬의 거행은 하나님의 한 가족 안에서 형제와 자매로 간주된 자들 사이에서 화해와 나눔의 실천을 요구하며,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삶 속에서 적절한 관계를 추구하도록 계속 도전을 준다. . . . 그리스도의 몸의 성례적 교통 속에 연대하는 것과, 기독교인들이 다른 사람들과 세계에 대해 책임을 다해 돌보아야 한다는 것 등이 예전에서 발견된다. 서로의 죄에 대한 용서, 평화의 표징, 모든 사람들을 위한 중보기도, 빵과 포도주를 함께 나눔, 병자들과 감옥에 갇힌 자들을 위해 떡을 떼거나 그들과 함께 성만찬을 기념하는 것 등.”

세계성찬 주일은 무엇보다도 전 세계의 다양한 교회들이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성찬예식을 거행함으로 우리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라는 의식을 공유하면서 연대의식을 갖는 날이다. 더 이상 분열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다양한 지체들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화해와 평화, 나눔과 연대로 가득 찬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는 도구가 되겠다는 결단과 다짐의 날인 것이다. 더 나아가, 성찬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삶의 현장 곳곳에서 살아내라는 새로운 부름인 것이다. 이는 에베소 교회를 향한 바울의 권면이자 오늘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권면이기도 하다.

“성령이 여러분을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입니다. . . . 주님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하나님도 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아버지시요,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을 통하여 계시고 모든 것 안에 계시는 분이십니다.”(에베소서 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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