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좌충우돌
  • 서정남
  • 승인 2023.09.05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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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문화권으로 다시 오면서 이곳 문화를 지난 십수 년간 익혀서 정착에 어려움이 없으리라 판단했다. 세대가 바뀐 것을 미처 인지를 못 하였고 문화도 제자리걸음은 아니었다.

20년 전, 딸이 고등학교 하굣길에 늘 버스를 기다리던 그 쇼핑센터에 나는 일이 있어서 갔다. 마침 하교 시간이라 학생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데 교복입은 딸이 '엄마' 하며 부를 것만 같았다. 순간 뭉클해지며 그 장소를 인증샷 해서 딸에게 보내려고 몇 컷을 찍었다. 그러고는 엘리베이터를 타는데 한 학생이 뒤따라 뛰어오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말았다. 유리 너머로 보니까 그 학생은 계단으로 다급히 뛰어 내려와서 엘리베이터가 1층에 닿자 문 앞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런가 보다 하고 나는 내 길을 가는데 그 학생이 "Excuse me" 하며 날 부르며 이어서 자기의 사진을 지워달라는 것이다. 기가 막혔다. 난 너를 찍지 않았다고 하니까 찍었다고 우겨댄다. 핸드폰을 열어서 같이 확인해 보았다. 수 많은 학생의 저 뒤편에 한 점 크기의 자기 얼굴을 가리킨다. 나는 전체 scenery를 찍었다고 하니까 계속 지워 달란다. 무엇이 어려우랴? 보는 앞에서 지워주니까 "쌩큐 마담~" 하고 떠난다. 나는 벤치에 앉아서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저 학생의 back ground는 어떤 상황일까?

지인 한 분이 떠오른다. 몇십 년 교제했는데도 가족사진을 한 번도 안 보여 주었다. 내가 가족들 모습 좀 보자고 했더니 그분이 낯이 붉어지면서 사진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아픈 사연이 있었다. 젊은 시절에 괴한에게 전 가족이 납치당한 것이다. 요구하는 금액도 건넸을뿐더러 감금당한 트라우마를 오래 겪어야 했고 남편은 이름까지 개명하였다고 말해주었다. 그 학생도 그런 사연일까?

* 초상권이라는 신종단어가 생긴 시대이다.

마트에서 생수팩을 샀는데 병 1개에 10센트를 돌려준다고 프린트되어 있다. 열심히 병을 모아서는 마트로 들고 갔다. 생수를 산 뒤에 그 병값을 빼 달라고 하니까 casher는 모르는 일이라고 일축한다. 나는 이 프린트가 안보이냐고 하니까 casher 왈, 빈병은 재활용센타에서만 취급한단다. 다소 크게 말한 게 창피했다. 위치를 물으니까 자기는 모른단다.

집에 모아둔 생수병이 쌓여만 가던 어느날 길을 지나다가 사람들이 빈 병이 가득한 가방을 들고 줄을 서있는게 보인다. 다가가서 물으니까 저 기계가 Recycling machine 이라고 한다. 이렇게 하나씩 알아가는데 시간이 더디기만 하다.

* 기계가 일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일전에 한국 방문하신 성도님이 내가 부탁한 선글라스에 시력을 넣어오셨다. 안경을 받아서 써 본 순간, 눈이 핑 돌았다. 다시 써 보아도 잘 안보인가. 재확인 한 결과는 선글라스에다 돋보기 시력을 넣어오신 것이다. 선글라스 용도라고 말했는데…. 한국에서 전화로 묻기에 나는 선글라스에 다초점이 적용되나 해서 색상도 원본처럼 꼭 같이하라고 했나 보다.

* 세상에 하나뿐인 검정 돋보기가 나에게 있다.

지난 3월에 한국서 놀러 온 친구와 함께 현대미술관을 찾았다. Wall paintings와 바닥 설치미술들이 풍성하였다. 각자 취향에 맞춰 관람하는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내 친구가 안 보인다. 급히 뛰어가 보니 갤러리 경호원들이 모여있고 내 친구는 그 가운데서 울상이었다. 친구가 맞은편 벽의 대형 작품에 반해서 카메라를 들고 그리로 직진하다가 그만 주의력 부족으로 바닥 소형설치 작품을 발로 넘어뜨린 것이다. 내가 가서 자세히 보니 넘어졌지만, 상해는 입히지 않았다. 그래도 이 경우는 일단 작가의 의견을 우린 따라야 한다. 친구는 기도를 하는 듯 했다. 경호원이 작가와 전화 연결을 한 결과 작가가 며칠 후에 와서 직접 수정하겠다고 했다. 그때까지 이 작품은 경호원도 손을 댈 수가 없다. 자칫하면 큰 금액을 변상할 위기를 모면하였다. 친구는 미국서 20년을 살아서 호주 문화에도 별 무리 없이 있다가 갈 줄 알았다.

* 다름은 부작용을 초래한다.

내가 30년 전에 이민을 왔을 때 담임목사님의 영화관 비유가 아직도 생생하다. 극장 안, 깜깜한 실내이지만 들어온 지 오래된 사람은 이제 들어오는 사람도 보이고 영화도 볼수 있다. 그러나 막 들어선 사람은 바로 앞도 안 보여서 손으로 방향을 파악하다가 앉은 분의 허벅지도 짚고 머리도 잡고 그러질 않나? 이런 상황을 이민 정착 과정에다 비유하셨다. 남의 허벅지 짚지 말고 잘 뿌리 내리자고 얌전해 살았다. 그런데 잠시 나갔다가 다시 왔는데 너무나 급변해있다.

* 나도 좌충우돌이다.

교회공동체도 같은 모습이다. 새로 이적한 분은 오래된(성숙한) 분들이 속으로 웃으며 기도해 주는 것도 모른 체 종종 나대기도 한다. 세월이 지나면 말씀이 거울이 되어 자신의 옛 모습을 보게 된다. 그 때는 아주 부끄럽다. *부끄러움을 아는 순간이 축복이다.

"곧 지혜가 네 마음에 들어가며 지식이 네 영혼을 즐겁게 할 것이요 근신이 너를 지키며 명철이 너를 보호하여 악한 자의 길과 패역을 말하는 자에게서 건져 내리라(잠2: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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