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장례와 관련해 떠오르는 단상 20
죽음, 장례와 관련해 떠오르는 단상 20
  • 안양준
  • 승인 2023.12.13 10: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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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위고의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폭풍우가 몰아치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 잔느의 남편은 고기잡이를 위해 바다에 나갔다. 빗줄기는 유리창을 때리고, 파도 소리가 천둥처럼 울어대지만 따뜻하고 아늑한 오막살이 집 안의 큼직한 이불 속에 다섯 아이들이 새근새근 잠들어 있다.

잔느는 난파선의 무서운 모습이 떠오르며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다. 남편은 폭풍우 속에서 시시각각 위협과 맞서 싸우지만 자식들에게 줄 밀가루 빵 같은 건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나마 별 탈 없이 자라 주는 것도 하나님의 은총이라 할 수밖에. 

지금 그이는 어디쯤 있는지! 하나님, 제발 도와주소서! 은혜를 내려 주소서!

잔느는 두툼한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섰다. 남편이 돌아오고 있는지, 바다는 어느 정도 가라앉았는지, 등대 불이 켜져 있는지 보기 위해서였다. 

동네 어귀 해변에 다 낡아 반쯤 허물어진 오두막집이 한 채 있다. 바람은 그 초라한 집을 휩쓸어 버리려는 듯 기승을 떨었다. 문 앞에 걸음을 멈춘 잔느는 창문을 기웃거린다. 집 안은 바깥만큼이 깜깜하다.

‘저 가엾은 병자를 돌봐 주어야 했는데, 깜빡 잊었구나! 밤이 되면 상태가 더 나빠질 거라고 그이가 일러줬는데! 저 사람은 돌봐 줄 이도 없다던데!’

그녀는 둘째 애를 가지면서 과부가 된 여인이다. 문을 두드려도 인기척이 없다. 거센 돌풍이 몰아치며 삐걱거리던 문이 활짝 열려 얼떨결에 문 안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축축하게 젖어 있는 것이 오랫동안 불을 지핀 일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쪽 벽의 지푸라기들이 쌓인 곳에 과부가 누워 있다. 머리는 뒤로 젖혀지고, 입을 벌린 상태로 그녀는 죽어 있었다. 어미의 침대 발치에 어린아이 둘이 잠들어 있다. 어미는 죽어가면서도 자기 옷가지를 어린 것들에게 덮어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잔느는 정신없이 집으로 향해 줄달음을 쳤다. 심장이 몹시 뛰고 누군가 쫓아오는 것 같아 뒤를 돌아볼 수도 없다.

“그이가 뭐라고 할까. 나는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일까! 다섯 아이의 치다꺼리에 지쳐…. 아, 나는 바보야…. 차라리 그이가 나를 실컷 때려 주기라도 했으면…. 아아, 아냐, 좋아! 차라리 내가…!”

어느새 비가 멎고 먼동이 터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람은 여전히 휘몰아치고 바다도 으르렁대고 있다. 

문이 벌컥 열렸다. 살갗이 검게 그을고 키가 큰 어부가 찢겨지고 물에 젖은 그물을 질질 끌며 안으로 들어섰다.

“망했어, 고기 꽁지도 걸리지 않은걸. 그물만 찢기고 말았지, 간밤 같은 폭풍우는 본 적이 없을 정도야. 악마같이 몸부림치면서 배를 공 놀리듯 했다니까…. 목숨만 살아 돌아온 것도 다행이지…. 당신은 혼자서 무얼 하며 지냈소?”
“저요?”

잔느는 새파래진 얼굴로 “전 여기 앉아서 뜨개질을 하고 있었지요…. 바람소리가 어찌나 심한지 혼자 있는 것이 무서웠고…. 당신이 걱정되었어요….”

마침내 잔느는 몸을 떨며 죄지은 사람처럼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여보, 시몬 아주머니가 죽었어요. 언제 죽었는지는 모르겠어요. 어린것들을 생각하면 차마 눈도 감을 수 없었을 테니…. 아직도 젖먹이인 아이들을 둘이나 남겨놓았으니 말예요.”

남편의 선량하고 정직한 얼굴이 엄숙하고 진지해졌다. 

“어쩌지? 우선 어린것들을 데려와야지! 얼른 달려가서 애들을 데려와!”

그러나 잔느는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웬일이야? 어린것들을 데려오는 게 내키지 않아? 왜 그래? 어서!”

잔느는 천천히 일어서 남편을 침대 곁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는 이불을 살며시 들쳤다.

거기에는 이웃집 죽은 과부의 아이들이 평화롭고 깊은 잠을 자고 있었다. 


단편소설의 함축적 내용이 어쩌면 장편소설보다 더 큰 감동을 주는 경우가 있다. 많은 단편소설이 있지만 모파상의 ‘비겟덩어리’, ‘목걸이’, ‘쥘르 삼촌’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기억에 남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빅토르 위고의 ‘가난한 사람들’은 모파상과는 또다른 차원의 감동을 보여준다. 모파상의 단편은 뭔가 씁쓸함, 아픔을 독자에게 전달하는데 위고의 단편은 잔잔함, 승화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티브는 구리 료헤이의 ‘우동 한 그릇’과 같은 류처럼 보이지만 그와는 또다른 영역이라 할 수 있다.

소설 속의 잔느가 한 행동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행동이다. 하지만 그녀가 처한 환경은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는 형편이다. 

가난한 어부의 아내, 다섯 아이의 어머니.

그럼에도 그런 선택을 한 그녀의 행동이 감동이다. 또한 이를 당연한 듯 데려오라는 남편의 말은 가난한 가장이 세상 물정 모르고 부리는 허세가 아니다.

이 모든 것의 해답은 그들이 믿는 신앙, 즉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다, 이것이 기독교가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며,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세상이 진정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이다. 

도저히 두 아이를 지켜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어머니의 비극을 초월하는 것은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이미 제시되었다. 가난과 죽음을 뛰어넘는 위대한 신앙이 오늘날 왜이리 전락하고 말았는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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