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장례와 관련해 떠오르는 단상 09
죽음, 장례와 관련해 떠오르는 단상 09
  • 안양준
  • 승인 2023.09.27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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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속에서

정원(庭園)의 한편 구석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추(初秋)의 양광(陽光)이 떨어질 때,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래서 가을날 비는 처량히 내리고 사랑하는 이의 인적(人跡)은 끊겨 거의 일주일간이나 혼자 있게 될 때….

안톤 슈낙이 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라는 산문 속에 죽음과 관련된 단어들을 찾아 본다.

시체, 돌아가신 아버지, 공동묘지, 세상을 떠난, 잠들다, 묘비명, 오뉴월의 장례 행렬 등이다.

그리 길지 않은 문장에 죽음과 관련된 단어가 많이 등장하는 것은 죽음과 슬픔이 밀접한 관계에 있는 까닭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시기적으로는 가을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계절인 듯 싶다.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래서 가을 비는 처량히 내리고….”라는 구절을 읽으며 창밖에 내리는 가을비를 바라본다.

그리고 안톤 슈낙이 슬퍼한 것 중에 하나가 학창 시절의 친구 집을 방문했을 때이다. 그 친구는 “이제는 우러러 볼만한 고관대작, 혹은 돈 많은 기업주의 몸이 되어, 우리가 몽롱하고 우울한 언어를 조종하는 한낱 시인밖에 못 되었다는 이유에서 우리에게 손을 주기는 하나, 벌써 우리를 알아보려 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것같이 보일 때” 슬프게 한다고 하였다. 

무엇 때문일까? 사르트르가 동경에서 행한 강연을 수록한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 지식인의 탄생 배경을 설명한다. 17세기 말엽 부르주아지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자신들을 계급으로 규정할 필요성을 느끼고 이를 성직자가 아닌 실용적 지식을 지닌 전문가들을 통해 구축한다. 법률가(몽테스키외), 문필가(볼테르, 루소) 등이 성직자를 대신하여 스스로를 ‘철학자’, 곧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였고 부르주아지의 행동과 요구를 지지하고 정당화해 주는 합리적 우주관을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지식인은 부르주아지와 종속관계가 되었다. 소수의 사람에게 봉사하는, 노동하는 계급에게는 궁핍화의 앞잡이에 불과한 그럼에도 지배층에게 택함을 받지 못할 경우 누구보다 궁핍할 수밖에 없는 지식인의 모습은 안톤 슈낙을 슬프게 했을 것이다.

안톤 슈낙의 산문 중에 등장하는 “크누트 함순의 두세 구절, 굶주린 어린아이의 모습”은 무슨 의미일까? 크누트 함순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로 헤밍웨이가 “내 모든 글쓰기는 함순으로부터 배웠다”고 말할 정도였다. 「굶주림」이 그의 대표작인데 극도의 가난으로 굶어죽을 상황까지 이르렀던 자신의 체험담을 쓴 것이다. 그런 그는 2차 세계대전 중 나치를 공공연하게 지지한 까닭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안톤 슈낙 역시 나치에 협력한 경력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그런 연관성이 함께 슬픔을 공유한 지식인으로 언급된 것이 아닐까? 상대가 누구이든 어쩔 수 없는 구조를 탓하며 지지의 글을 써야 하는 오늘날의 지식인에 비하면 무척 높은 족속이라 여겨진다.

“어렸을 적에 살던 조그만 마을에 많은 세월이 지나 다시 들렀을 때. 그곳에는 이미 아무도 당신을 알아보는 이 없고 일찍이 뛰놀던 자리에는 붉고 거만한 주택들이 들어서 있고, 당신이 살던 집에서는 낯선 이의 얼굴이 내다보고, 왕자처럼 경이롭던 아카시아 숲도 이미 베어져 없어지고 말았을 때.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오랜 시간이 흘러 자신이 살아온 흔적이 사라지고, 자신의 존재조차 사라질 때 망각의 슬픔을 겪게 될 것이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에 “멀지 않아서 당신은 모든 일을 잊어버리고 멀지 않아서 모든 사람이 당신을 잊어버릴 것이다.”라는 글처럼, 전도서 1장 11절에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는 말씀처럼 잊혀짐은 당연한 것임에도 슬픔을 동반하는 것 역시 당연한 것이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강원도 태백의 철암이라는 작은 탄광촌이었다. 한때 수많은 이들이 몰려들던 곳이었지만 광산 합리화 정책 이후 주민 대부분이 떠나고 황량한 마을로 변했다. 탄차 위로 석탄을 쏟아붓던 거대한 구조물은 흔적없이 사라지고 마음에 슬픔으로 자리잡는다. 안톤 슈낙의 글에 “흐르는 시커먼 냇물”이란 글은 무슨 연유에서 씌어진 것일까?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며 방학 때마다 밤차를 타고 내려오는데 동틀 무렵 기차가 고향역에 가까워지면 맨처음 눈에 들어오는 것이 새까만 물이다. 그 물을 보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 무슨 까닭일까? 안톤 슈낙이 말한 것이 설마 그런 시커면 냇물은 아니겠지?

“공동묘지를 지나갈 때. 그리하여 문득 ‘여기 열다섯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난 소녀 클라라 잠들다.’라고 쓴 묘비명(墓碑銘) 읽을 때. 아, 그는 어렸을 적 내 단짝 친구.”

기독교 장례 사역을 하며 많은 시간을 장례식장과 화장장, 봉안당 등을 다니는 일이 일상이 되어버릴 때 죽음은 많은 이들에게 슬픔이요, 아픔이라는 당연한 진리를 되새길 필요를 느끼게 된다.

2주전 지인을 통해 알게 된 선교사님의 장모인 여성 목사님의 장례에서 화장이 끝난 후 이동하는 과정에 바로 앞의 분들이 너무 늦게 움직이는 탓에 불편함이 있었다. 앞으로 나아가보니 영정에 어린 아이의 사진이 있었다. 일행에게 설명하고 천천히 기다렸다가 움직이도록 하였다.

어린아이를 잃은 부모의 심정이 어떨까? 물론 그 아픔은 어느 것으로도 비교할 수 없다. 그럼에도 기독교의 경우 예수님의 죽음으로 위로할 수 있다. 자신의 아들이 십자가 고통을 겪으며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아야만 했던 마리아의 심정과 모든 것을 묵인하며 끝끝내 참아내셔야만 했던 하늘 아버지의 비통함을 알기에, 하나님이 누구보다 자식을 잃는 슬픔을 잘 아신다는 사실 때문에, 그럼에도 세상의 모든 죄인, 나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 아들을 죽기까지 내어주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조금은 위로가 되지 않을까?

예수님을 다시 살리사 이를 믿는 자들에게 부활의 소망을 갖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자들은 소망 없는 자처럼 슬퍼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살전 4:13)

이것이 죽음 앞에 서 있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 4:18)고 성도들을 권면하고 있다.

안톤 슈낙의 글에서 볼 수 있듯이 죽음은 분명히 인간의 슬픔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사망을 이길 수 있다. 슬픔의 차원을 벗어나 오히려 기쁨의 차원으로 승화되는, 그렇기에 주님은 항상 기뻐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우리를 슬프게 하는 모든 것을 극복케 하는 놀라운 능력을 지닌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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