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든 다석 유영모와 씨알 함석헌을 다시 깨울 때
잠든 다석 유영모와 씨알 함석헌을 다시 깨울 때
  • 김봉구
  • 승인 2023.10.05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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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 유영모(1890∼1981)와 씨알 함석헌(1901∼1989)

다석과 씨알은 11살 차이지만 사제지간으로 지냈다. 남강 이승훈(1864~1930)이 도산 안창호(1878~1938)의 영향을 받아 1907년 평북에 오산학교를 세웠다. 현재는 용산 보광동에 오산중,고등학교가 있다.

고당 조만식(1883~1950) 교장 후임으로 다석이 교장을 할 때 함석헌과, 김교신 등이 학생으로 사상적으로 다석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다석의 호는 多夕, 저녁 석자가 세 개가 있는데 삼시세끼를 저녁에 한번만 먹는다는 뜻으로 호를 多夕으로 한 것으로 이는 그가 존경했던 인도 간디의 1일1식을 따른 것이다.

다석과 씨알 사제는 공통점이 있는데 씨알 역시 스승 다석의 1일1식을 따라서 실천했다. 둘은 한복을 입고, 수염을 길렀고, 일본 유학파라는 공통점도 있다.

다석과 씨알은 한국을 대표하는 근현대 사상가요, 철학자, 영성가요, 실천가였는데 다석은 당시 조선을 대표하는 3대 천재로 불릴 정도로 유불선, 사서오경 등에 해박했을 뿐 아니라 여기에 기독교를 접목해 독창적인 동서 융복합(무지개) 철학을 만들어 냈다. 아직까지도 한국에 다석의 사상을 뛰어넘는 인물이 나오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그의 학문의 깊이는 매우 심오하다.

씨알은 자연스럽게 스승의 영향을 받아 다석의 씨알 사상을 좀더 구체화 했고, 좀더 발전시켰고, 대중화하는데 기여한 천재였다.

일찍이 다석 유영모와 씨알 함석헌은 생명과 평화사상에서 씨알(民)이 국가의 주인인데 국가주의, 종파주의가 세계평화로 나아가는 방해물이라고 지적하고, 더 나아가 우주생태평화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주체성으로 보고, 생명과 평화를 가로막는 모든 장벽들을 반평화 반생명 세력으로 규정했다. 그래서 남북한 통일 주체 역시 국가가 아닌 씨알(民), 민초들이라고 주장했다.

‘하나’를 찾고 ‘하나’로 돌아가자는 것이 다석 사상의 시작과 끝인데, 하나는 하늘 또는 하나님을 의미한다. ‘하나’로 돌아감으로써 ‘하나’ 속에서 물건과 인간의 생명이 완성되고, 자유와 평등한 세계가 열리고, 상생평화의 통일세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다양한 문화를 존중하고 하나의 인류라는 세계주의는 곧 평화로운 세상, 천국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현재의 다문화사회, 세계시민주의와 인류평화론으로 100년 전부터 설파했다는 것 역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진정한 세계구원은 나, 우리, 국가라는 울타리 안에 갇아 두어서는 안 되며, 우리만 천국에 간다는 것은 매우 교만한 생각으로 그것은 진정한 신앙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성서의 가르침대로 예수를 팔아먹은 가룟 유다조차도 지옥에 갇아두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유다도 구원 받을 천국 씨알이요, 일제에서 해방된 조국도 자주독립국가가 되었기에 일본도 동등하게 세계구원의 일원으로 받아 들이는게 진정한 평화라고 말했다.

씨알은 개인의 평화, 동북아평화, 세계평화 더 나아가 우주평화까지 설파했다는 점은 씨알의 탄생 122주년을 맞은 2023년 한국교회에 주는 교훈이 크다 하겠다.

다석이나 씨알이 수많은 옥고도 치르면서 독립과 민주화, 인권 등 격변의 현장에서 목소리를 낸 것은 사실이나 그들을 민족주의자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그들의 사상은 이미 국가와 종교와 민족을 뛰어 넘어있었다. 세계의 평화와 우주의 평화까지 설파했던 것은 그만큼 사상의 깊이가 깊고, 영성이 심오한 상태까지 들어갔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래서 씨알이 노벨평화상 후보로 두 번 올랐을지도 모른다.

아직도 그들을 민주투사로만 여기고 민족주의자로 갇아 두는 것은 그들의 전체가 아닌 필요한 일부만 이용하는 것으로 군맹무상(群盲撫象) 장님들이 코끼리 다리 만지는 격인 것이다.

본론으로 들어가 필자가 주장하는 세계평화부(인구이민부) 신설은 두 분의 생명∙평화사상, 성서와 타 종교 등 인류보편의 가치인데 ‘국익을 위해서 세계평화부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두 사상가는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들은 국가주의는 세계평화로 나아가는데 장애물로 인식했고, 또한 국가를 뛰어 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필자가 ‘국익에 보탬이 되는 세계평화부’ 신설을 주장한 이유는 국가주의에 빠져서가 아니라 그렇게라도 이야기해야 이해하기 쉽고, 동의하는 사람들이 있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국익과 관계없는 세계평화부를 이시대 어느 누가 동조하겠는가?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를 늘 외치고,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를 늘 찬양하고 기도하면서 한국교회는 어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세계평화, 우주생태평화의 길로 가고 있는가?

잠든 다석 유영모와 씨알 함석헌을 다시 깨울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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