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9장에 보면 한 관리가 예수님께 나아와 자신의 죽은 딸을 살려달라고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전후의 문맥으로 보아 이 사람은 누가복음 8장에 나오는 회당장 야이로입니다.
[마 9:18-20] 1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니 19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 20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눅 8:41-42] 41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42 이는 자기에게 열두 살 된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밀려들더라
마태복음과 달리 누가복음은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께 간청하고 있던 때는 아직 딸이 죽지 않고 죽어가고 있었음을 강조합니다. 사람은 달려들고, 딸은 죽어가고 야이로는 지금 급급합니다. 저 많은 사람들 중에는 자기만큼이나 절박한 사람들이 또 있을 것이고 그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습니다. 좌로도 우로도 치우침이 없이 곧장 자신의 집으로 모셔야 했습니다. 그렇게 급하게 예수님을 모시고 가는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스스로 발걸음을 멈추시자 야이로는 더 답답해집니다. 알지도 못하는 한 여인이 예수님의 길을 멈추시게 했습니다. 다행이 혈루증 앓던 여인과의 이야기는 금방 끝났고, 고쳐진 여인을 향하여 평안과 구원을 선포해 주심으로 마쳐졌습니다.
그런데 야이로가 자신의 집에 이르렀을 때 예측했던 최상의 비극 시나리오가 펼쳐졌습니다. 그 사이에 아이는 죽었고, 아내와 가족들과 친척들과 이웃들은 모두 통곡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슬퍼하며 앞이 캄캄해지는 야이로에게 예수님께서 이야기를 시작하셨습니다.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다. 그냥 자고 있는 것이니 내가 깨우면 된다.’ 예수님께서는 방에 들어가셔서 죽은 아이의 손을 잡고 아이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일어나라고 하셨고 그 즉시 아이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셨고, 사람들에게 이 일을 널리 알리지 말라고 하시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누가복음을 읽어 가노라면 다른 복음서에 비해서 잃어버린 사람, 소외된 사람, 불쌍한 사람에 대한 기사를 유난히 많이 읽게 됩니다. 1장에 보면 천사 가브리엘은 예수님을 잉태할 사람으로 귀족이나 왕족이나 권세자들이 아닌 스스로를 주님의 여종으로 아는 촌 동네의 무명선수 마리아에게 찾아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게 됩니다. 2장에 보면 예수님의 탄생소식을 처음 접한 사람들이 천한 목동들이었습니다. 3장에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황제나 총독이나 분봉왕이나 대제사장이 아닌 빈들에 있는 요한에게 임함을 강조합니다. 4장에서는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 먼자 에게 복음이 전해집니다. 5장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로 택함 받은 사람들이 어부들임을 강조하고 6장에서도 오른손 마른 한 병자에게 관심을 두셨습니다. 7장에서는 가버나움이라는 큰 도시의 통치자인 백부장이 아니라 그 백부장의 종에게 사랑을 나타내주십니다.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것도,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이야기도 결국은 누가의 관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말해주는 부분입니다. 8장에 보면 귀신들려 마을에서 쫓겨난 소외당한 한 영혼을 위해서, 풍랑의 위협을 무릅쓰고 생명의 위협을 감수하면서까지 바다 건너 마을로 이동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어지는 8장의 다른 이야기, 12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도 고쳐주시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십니다.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12해를 혈루증으로 앓다가 고침받은 이야기를 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시러가시는 그 긴박함 중에 끼워 놓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신 이야기 따로 하고, 12해를 혈루병으로 앓던 여인의 이야기를 따로 해도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 누가는 왜 이 두 가지 사건을 겹쳐서 기록하며 회당장 야이로와 베드로를 비롯한 사람들의 마음을 조급하게 하는 것일까요?
누가는 본문에서 소외된 자, 불쌍한 자, 그리고 두려움 속에, 병 가운데, 외로움 가운데 사는 그 한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는 일도 물론, 중요하지만 당장 거절해서는 안 되는 아주 중요한 일이 있음을 또한 강조합니다. 그 일이 영혼을 살리는 일이라면, 소외되고 버려지고 불쌍한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을 나누는 일이라면 절대로 소홀히 해서는 안 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쁘다고, 급하다고 우리는 종종 제일 중요한 일을 놓칠 때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8장에서 누가는 매우 다급하게 사건을 서술합니다. 풍랑 이는 바다도 건너가야 하고, 건너가서는 귀신에 눌려 사는 한 사람을 귀신으로부터 자유하게 해 주어야 했던 이야기를 전해야 했습니다. 또,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이야기도,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고 있는 여인을 고치신 이야기도 전해주어야 했습니다. 어느 것 하나 소홀히 여길 것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식사하실 겨를도 없이 바쁘셨을 겁니다. 세상에 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나 일을 다룰 때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경향이 아주 많습니다. 능력 있는 사람일수록 더 합니다.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사람에게는 시간의 한계, 공간의 한계, 체력의 한계, 능력의 한계가 있으니까 선별해서 일을 해야 하는 것 맞습니다. 그러나 늘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그 누구에게도 서운한 감정이 일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어느 한 개가 아니라 모두를 취해야 할 때가 있음도 알아야 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