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아침 교인들과 심방예배를 드리러 가기 위해 교회 버스에 올랐습니다. 그날 아내는 고등학생인 아들이 자취하는 집에 들렸다 오기 위해 먼저 승용차를 타고 출발했습니다. 버스에 오른 나는 한 성도님이 버스의 우측 두 번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제 옆으로 오시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는 앞뒤 간격이 좁아 굉장히 불편한 자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도님은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제 옆에 와서 앉으셨습니다. 성도님은 낡고 오래된 가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됐냐고 물었더니 한 30년 정도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오래되었지만 버리기가 뭐해서 그냥 쓰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도님은 저에게 아들의 공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지난번에 성도님이 저희 아들에게 물었는데, 국어 성적이 잘 안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좋은 대학에 가려면 국어 학원에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좋은 대학은 국어성적을 본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의 교육에 대해서는 아내가 도맡아 하고 있었기에 그 이야기를 아내에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성도님은 지난번에 이미 아내와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아들을 학원에 보내는 것이 쉽지 않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들이 자취를 하고 있기에 월세를 내야 했고, 또 지금 영어 학원에 다니면서 영어 학원비도 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매달 꽤 많은 금액이 지출되고 있었기에 또 다시 학원을 보내는 것이 우리 사정에 큰 부담이었습니다.
성도님은 아내와의 이야기를 나눈 후 학원비가 많이 들어서 아들을 학원에 보내지 못하는 목회자의 심정을 생각하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성도님이 학원비를 좀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에게 흰봉투 두 개를 건네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하나는 학원비이고, 하나는 학원비의 십일조를 따로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 개의 봉투중에 하나는 학원비, 하나는 그 학원비에 대한 십일조라는 것입니다. 저는 당황했습니다. 아들의 학원비를 받는 것도 당황스러운데, 학원비의 십일조까지 받는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앉은 좌석이 운전석 바로 뒤였는데, 그 성도님은 아주 은밀하게 저에게 말하면서 봉투를 건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도 이런 경우를 처음 겪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남이 주는 돈을 받으면서 그 받은 돈을 그대로 쓰라고 십일조까지 주다니, 정말 깜짝 놀랄일이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저는 아내와 따로 차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제게 준 봉투를 아내에게 건네면서 오늘 성도님이 학원비와 학원비의 십일조까지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자신도 그런 말 들어보았다고 했는데 정말 그런 분이 있구나 하고 놀라했습니다. 그리고 아내는 봉투를 열어 수표를 확인했습니다. 수표에는 ”일백만원“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봉투를 열어 보았습니다. 순간 아내는 ‘어머나 어머나’를 연발했습니다. 다른 봉투에 있는 수표에는 ”일천만원“이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갑자기 가슴에 ‘쿵’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버스에서 ‘큰 금액’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 설마 했는데 정말 설마가 현실로 나타나는 순간 당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떻게 목사님 아들의 학원비를 선뜻 줄 수 있을까? 게다가 그분은 자신을 위해 그리 돈을 많이 쓰지도 않습니다. 집도 그리 크지도 않고, 차도 중형차도 아닙니다. 큰 부자로 보이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세상은 참 알수가 없습니다. 부자인 듯하나 가난한 사람도 있고, 가난한 듯 하나 부자인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고수인 것 같은데 하수인 사람이 있고, 하수인 것 같은데 엄청난 고수도 있습니다. 겉은 화려한데 얻어 먹는 사람이 있고, 겉은 수수한데 베푸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번에 저는 그런 사람을 보았습니다.
처음 받아보는 남의 십일조 봉투, 어떤 사람은 자기 십일조도 제대로 못 내는데 어떤 사람은 남의 십일조까지 내어주니, 참 놀라운 세상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다시 한번 숙연해집니다. 이런 분들이 우리교회 성도구나. 이런 분들이 나의 설교를 듣고 있구나.
설교를 준비하며 또 다시 고민하게 됩니다.
'나는 내가 말한 설교대로 잘 살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