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장례에서 발생하는 문제들 3
기독교 장례에서 발생하는 문제들 3
  • 안양준
  • 승인 2022.06.08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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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대한 성경적 근거

3. 기독교 장례라면 예수님의 장례를 모범으로 삼아야 하지 않는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시신을 어떻게 처리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성경을 통해 잘 알 수 있는 것이 예수님의 장례에 대해서는 사복음서가 모두 기록하고 있는 까닭이다.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마 27:57-60)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 지가 오래냐 묻고 백부장에게 알아 본 후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주는지라 요셉이 세마포를 사서 예수를 내려다가 그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막 15:43-46)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눅 23:50-53)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요 19:38-40) 

위의 성경 구절을 토대로 예수님의 무덤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준비해 놓은 새 무덤으로 바위를 파서 시신을 넣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은 아리마대 요셉을 부자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이사야 53장 9절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라는 예언의 성취로 볼 수 있다.

로마법에 의하면 십자가에서 처형된 사형수의 경우 그냥 방치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시신을 장사지내겠다는 청원이 들어올 경우 허락하는 것 역시 관례였다. 아리마대 요셉은 산헤드린 공회원으로 사회적 지위가 높은 인물이었고, 로마 총독 빌라도 역시 예수님의 무죄를 주장했던 까닭에 요셉이 빌라도를 찾아가 청원하였을 때 순순히 시신을 내어주었고 그래서 정한 세마포로 예수님의 시신을 싸서 준비한 새 무덤에 넣고 돌을 굴려 막은 것이다.

다만 요한복음에만 니고데모가 몰약과 침향 섞은 것으로 예수님의 시신을 세마포로 쌌다고 했으며, 이러한 방식을 유대인의 장례법이라고 부연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몰약과 침향은 시신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장례를 기독교 장례의 모델로 삼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은 약간은 부정적이다.

무엇보다 팔레스틴의 경우 우리와 다른 지형적 환경으로 바위 속을 파서 장사를 지냈다고 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음을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그리고 현대에는 부패를 방지하는 소독용품들이 발달하였고 굳이 몰약과 침향을 사용하지 않아도 시신을 운구하여 안치하기 전 수시 과정에서 사용함으로 이중의 작업이 될 수 있다. 또한 예수님의 죽음 뿐 아니라 나사로의 죽음에서도 볼 수 있듯이 세마포로 시신을 완전히 싸매는 것도 부패의 속도를 지연시키기 위함인데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매장 시에는 대부분 시신을 완전히 싸매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현대에 들어 화장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데 육체의 부활과 관련하여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이를 반대하는 경우를 가끔씩 볼 수 있다. 고려시대의 경우 불교에서 말하는 다비(茶毘)라는 화장 풍습이 성행하였고, 조선시대의 경우 유교적 매장 문화가 정착되어 국가적으로 화장을 금기시하였다.

하지만 기독교의 경우 특별한 매장 방식을 고집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볼 때 매장의 경우가 많았어도 반드시 매장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는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 성경은 육체의 부활을 말하고 있지 않다. 정확하게 말하면 현재 갖고 있는 육체의 모습으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 살아나는 것이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전 15:42-44)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 15:52)

초대교회 당시 기독교를 박해하던 모습에 대해 시오노 나나미가 쓴 「로마인 이야기」에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일부는 야수의 모피를 뒤집어쓰고 들개 떼에 물려죽었다. 다른 이들은 로마 시대의 일반적인 처형법이었던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 나머지는 밤의 구경거리로 남겨졌다. 땅에 박은 말뚝에 한 사람씩 묶은 다음, 산 채로 불을 붙이는 것이다. 활활 타오르는 인간 기둥들이 관중석에서 마른침을 삼키는 시민들의 얼굴을 비추었다.”

짐승에 물려죽거나 불에 타서 죽은 경우 시신의 잔해(殘骸)가 거의 남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순교자의 죽음은 천국에서 가장 큰 상급으로 보상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이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내어버릴 수 있었던 것은 죽음을 넘어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며 나아간 까닭이다.

이처럼 예수님의 장례는 유대인의 장례법을 따른 것이지만 기독교 장례의 모범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에 기독교 장례는 죽음보다 부활에 더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 장례는 입관이나 발인 등의 절차까지도 초월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경우에는 성경적 근거에 기초한 온전한 예식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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