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역으로의 기독교 상조의 역할
선교사역으로의 기독교 상조의 역할
  • 안양준
  • 승인 2022.06.29 07: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그를 기억하라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 이후 산업화를 거치며 한국교회는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이루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두운 밤 산 위에 올라가 시내 야경을 바라보면 무엇보다 눈에 먼저 들어오는 것이 교회의 네온 십자가가 아닌가!

밀레니엄이라는 단어가 온 사회를 한창 떠들썩하게 했던 1999년 미국 프라미스 키퍼의 ‘스페셜 게스트’라는 명목으로 LA와 덴버 지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프라미스 키퍼를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1990년 미국 중부 덴버의 콜로라도 주립대학 미식축구 코치였던 빌 매카트니가 스터디움을 가득 메운 열광적인 팬들이 경기 내내 뜨겁게 응원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2000년이 되기 전 신앙이 좋은 남성들이 스터디움을 가득 메우고 주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하는 꿈을 갖고 뜻을 같이 할 이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오래지 않아 스터디움을 가득 메운 남성들을 볼 수 있었고, 1997년에는 워싱턴 광장에 140만명의 남성들이 모인 모습이 우리나라 뉴스에도 방영되기도 하였다. 이후 프라미스 키퍼는 회원수가 900만명을 넘어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임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프라미스 키퍼 랜디 필립스 총재가 한국을 방문하여 설명회를 가졌고, 이때 참석한 이들을 주축으로 미국의 프라미스 키퍼 본부를 방문한 것이다. 당시 프라미스 키퍼 측에서도 한국은 대단히 중요한 파트너십을 가진 나라라고 생각하기에 프라미스 키퍼의 최고 핵심인 9인 위원회만이 사용하는 회의 장소에서 한국 대표들을 맞이하였다.

세계 제일의 교회, 수많은 선교사를 세계 곳곳에 파송하는 한국 교회의 저력을 무시할 수 있는 기독교 나라나 기관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한국 교회의 위상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교인수가 점점 줄어가고 있다. 예전처럼 뜨겁게 기도하고, 열심히 전도하던 열정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무엇보다 교회학교나 중고등부의 수가 줄어가는 현실이 한국교회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혈관을 통해 피가 힘차게 돌고, 심장 박동으로 맥박이 정상적으로 뛰고 -물론 인간의 몸은 한두 가지 방법으로 체크할 수 없지만- 모든 지체와 기관이 서로 연결되어 정상적으로 활동할 때 건강한 몸이라 할 수 있다. 한국 교회 역시 모든 지체와 기관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정상적으로 활동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 건강한 모습을 유지해 갈 수 있을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어떠한가? 흔히 한국교회의 특징을 ‘개교회 중심’이라고 한다. 물론 개교회 중심이라는 것을 부정적 의미로만 볼 것은 아니지만 성경적으로 볼 때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물론 짧은 글에서 한국교회의 제문제를 자본주의 논리를 대입하여 설명할 필요성은 느끼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선교적 지원이 양극화 현상에서 드러나는 약자에 대한 물질적 지원이라는 소극적 해석도 피하고자 한다.

기독교가 영적 건강 상태를 회복하려고 할 때 필요한 조치로서의 선교는 이보다 훨씬 더 넓은 의미에서 접근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선교 행위란 구원의 대상에게 구원의 방법을 제시하는 다양한 형태의 도움을 통틀어 말하는 것이라 정의할 수 있다.

예전에 원목 사역을 한 적이 있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사역을 하며 느낀 점은 첫째, 베이비부머 시대의 고령화로 병원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점(요양병원이나 요양원 등의 시설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둘째, 병원 내에 치료라는 명목으로 동양 종교가 신비하게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들은 종교다원주의를 표방한다.)이다.

온갖 사이비와 이단이 침투하는 심각한 영적 전쟁이 벌어지는 현장에서 선교 사역으로서 기독교의 역할은 어떠한가? 무엇보다 선교의 현장과 본부의 긴밀한 네트워크가 형성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감리교의 경우 본부가 인정하는 기관 외에는 거의 눈길을 주지 않는다. 결국 외부 지원 없이 모든 것을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선교는 좀더 공격적인 방식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생각되었다.

기독교 장례 사역도 마찬가지이다. 현실적으로 볼 때 기독교와 아무런 연관성이 없음에도 기독교 상조라는 이름을 내세워 사업을 운영하는 형태가 대부분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선교 사역으로 볼 때 기독교의 무풍지대라고 할 수 있다.

현재 고령화 시대가 되어지면서 병원만큼 사람들이 북적이는 장소가 장례식장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장례식장은 온갖 종류의 종교가 모이는 장소이다. 요즘 기독교 내에서 ‘웰다잉’이라는 용어를 자주 접할 수 있는데 장례식장은 웰다잉 이후의 장소이다. 얼마 전 ‘전도 프로그램 대안으로서 기독교 장례’라는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실제로 ‘죽은 자’가 아닌 ‘살아남은 자’를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는 선교 기지로서의 장례식장으로 시각을 달리해야 할 것이다.

바울의 전도 여행을 살펴보면 대도시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복음 전도의 효율성에 기초를 두고 있다. 많은 이들을 만날 수 있는 곳, 그런 의미에서 이 시대의 병원과 장례식장은 복음 전도가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다.

실제로 선교기지로서 기독교 장례를 생각할 때 재정적 지원은 그리 중요치 않다. 그보다 “어떻게 하면 선교의 역할을 잘할 수 있을까?”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 수많은 종교가 운집하는 장소로서 장례식장이나 화장장, 봉안당 등에서 한 영혼을 구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곳에서 기독교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현장에서 바라본 기독교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인 요소가 더 많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신앙과 삶이 하나가 되지 못하는 기독교인의 모습에서, 단지 물질적 이익만을 위해 기독교 상조라는 이름으로 접근하는 이들에 의해서 기독교가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할 때 버려지고 밟혀지고, 어둠만 깊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본부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본부는 엄밀한 의미에서 상황실이어야 한다. 전체를 한 눈에 바라보고 모든 지체로서 교회와 기관이 제 역할을 잘 감당해 나갈 수 있도록 지휘하고 통제하는 장소여야 한다.

그럼에도 일선에서 간절히 도움(SOS)을 요청해도 전혀 귀기울이지 않는다면, 일선에서는 무기가 절실하게 필요한데 아무런 공급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당연히 전쟁에서의 패배로 귀결될 것이다. 무엇보다 온전한 신앙을 겸비한 영적 군사를 파견해야 함에도 그조차 방치되고 있는 현실을 바라볼 때 많은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