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 프로그램 대안으로서의 기독교 장례
전도 프로그램 대안으로서의 기독교 장례
  • 안양준
  • 승인 2022.06.15 10: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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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기억하라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전 7:2)

성경은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초상집에서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까닭이다. 즉 인간은 누구나 죽을 수밖에 존재라는 사실을 재확인하며 제한된 자신의 삶을 마음에 두고 살아갈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하지만 마음에 두었다고 해서 그에 대한 아무런 해결책을 찾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초상집은 인생의 가장 큰 숙제를 던져주는 곳이며 그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전도와 연관하여 기독교 장례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불과 오래지 않은 시기에 교회에 장례가 발생하면 온 교우가 하나 되어 음식도 준비하고, 상여에 필요한 종이꽃도 만들고 담임목사가 직접 염을 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장례가 끝나면 새로 교회에 등록하는 이들이 많았다.

물론 요즘도 장례를 치르고 난 후 교회에 등록하는 이들이 있기는 하지만 예전만큼은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이제와서는 약간은 식상해져 가는 전도 프로그램들이 있다. 전도 폭발이나 대각성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D-day를 정하여 교회로 초청하는 것으로 너무 잘 알려져 있기에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정도이다. 하나의 이벤트(행사)처럼 굳어져 버린 전도 프로그램 -물론 그 가치를 조금이라도 떨어뜨릴 생각은 없다.- 의 핵심은 관계 전도이다.

자신과 관계가 있는 자들을 두고 기도로 준비하고, 접촉의 기간을 가진 후에 예정된 날에 초청했을 때 이에 응답하여 교회에 발길을 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점점 인간관계의 폭이 줄어들고, 기독교에 대한 관심이 약해지는 상황에서 예전처럼 큰 호응을 얻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장례식장을 전도 프로그램의 장소처럼 표현하는 자체가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오늘날 기독교 장례의 경우 예배 때에만 우르르 몰려왔다가 식사가 끝나기 무섭게 빠져나가는, 그리고 휑~ 하니 텅빈 자리에서 무슨 전도가 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예전처럼 교회 식구들이 장례식 3일 동안 계속해서 자리를 지킬 형편이 못된다는 사실을 누구나 인지할 것이다. 다들 바쁜 상황에 그나마 얼굴만이라도 비추고 가는 것으로도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하지만 ‘전도’의 차원에서 본다면 2박 3일의 시간은 매우 좋은 기회라고 할 수 있다. 예전엔 신앙을 가졌었지만 상처로 인해 떠난 이, 예전엔 열심이었는데 낙심해 있는 이, 무엇보다 죽음의 문제 앞에서 인생의 숙제를 풀어줄 누군가를 찾고 있는 이….

사도행전 8장에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 하나인 빌립에게 주의 사자가 나타나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관리하는 내시를 만나게 하시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가 어떻게 구약성경을 알게 되고 예루살렘에까지 올라오고 이사야의 글을 읽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는 그의 말처럼 답답함은 있지만 궁금증을 풀어줄 사람이 없을 때 그가 느꼈을 영적 갈증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런 그에게 다가온 빌립은 어떤 존재처럼 느껴졌을까?

하지만 현재 기독교 장례는 그런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인생의 가장 궁극적인 질문에 대해 유일한 대답을 갖고 있는 기독교이지만 정작 필요한 자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5년부터 1963년까지 평균출산률이 3명 이상이었던 세대를 ‘베이비 부머’라고 부른다. 그 세대의 사람들이 죽음에 직면해 가는 상황이 되면 병원만큼이나 사람이 가장 붐비는 장소가 장례식장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아이러니한 사실은 장례식장에 고인은 단 한 분, 나머지는 각자 인생의 숙제를 안고 가정이나 회사로 돌아갈 사람들이다. 그들이 장례식장에 와서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그럼에도 구원의 확실한 방법을 찾지 못하였을 때, 빌립 집사와 같이 이들에게 다가가서 영적 해갈을 느끼게 해줄 사람이 누구인가?

현대에 와서 ‘상조’는 대세이다. 사람이 죽으면 반드시 장례식장을 이용해야 하는 것처럼, 조금이나마 편하게 장례식을 치르기 위한 서비스업으로 상조를 이용하는 것이 대세라는 말이다. 그리고 상조에는 유족들 곁에서 모든 일정을 진행해 나가는 장례상담사 -혹은 복지사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가 있음은 약간의 상식이 있는 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어떻게 하면 제대로 된 기독교 장례를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 중에 장례상담사를 파송할 때 빌립 집사와 같은 성령의 사람(엄선한 전도사)을 파견하는 것으로 최소한 영혼 구원의 보루 역할을 하고자 한 것이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전 7:3-4)

희극보다 비극에서 얻는 것이 무엇인가? 카타르시스인가? 성경을 통해 인생의 고난이 가져다주는 복에 대해 배울 수 있다. 하지만 현대 교회는 고난보다 축복에 주안점을 두고, 실패보다는 성공에 가치를 두고, 무엇보다 이 땅에서의 축복, 이 땅에서의 성공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은 지혜자의 마음과 거리가 먼 것이다. 지혜자의 마음은 죽음 이후를 생각해야 한다.

전도에 있어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들추어내어, 가장 궁극적인 문제에 대한 답을 줄 수 있는 장소가 장례식장이라고 생각한다. 기독교 장례가 제대로 진행된다면 분명히 영적 새 생명이 탄생할 것이다. 물론 개교회가 더 큰 관심을 쏟아야 마땅하겠지만 최소한의 기회조차 잃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대안을 마련한 것으로 실제에 있어 전도의 열매들을 보았기에 교회에 소개하고자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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