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 받은 이유
저주 받은 이유
  • 이구영
  • 승인 2013.01.04 08: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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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1장에 20절 이후에 보면 예수님께서 안 어울리는 말씀을 하십니다.
사랑하라고, 용서하라고, 관용을 베풀라고 하셨던 예수님께서 저주를 퍼 부으십니다. 어떤 개인에게가 아니고 그 도시에 사는 전체의 사람들과 그 도시를 저주하십니다. 벳세다, 고라신, 가버나움입니다.
얼마나 강도 높게 비난을 하시냐면 그 옛날 죄악의 도성으로 불리웠던 소돔과 고모라보다도 더 못한 도시라고 표현하십니다. 마치 그곳에는 천국에 갈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고 선언하시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당시 가버나움만 해도 로마에서 군대를 파견할 정도로 괞챦은 도시이었습니다. 요즘으로 하면 경제적으로도 소득수준이 높은 편이고, 지식수준이나 교양정도, 혹은 교육수준이나 문화수준, 의료수준이 다른 도시들에 비해서 좋은 곳일텐데 왜 그렇게 예수님께 밉보였을까요?
간단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시는 기준은 사람들의 기준과 다릅니다. 사람들은 외모를 봅니다. 스팩을 따집니다. 학력, 재력, 혈통이나 가문, 자격증, 환경이나 가문을 따지지만 예수님은 믿음을 우선으로 보십니다. 그 기준에 그 도시들이 턱 없이 모자란 것입니다. 강남구에 서초구에 송파구에 산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닌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지역에 관계없이 믿음이 우선입니다.
그 도시들의 더 큰 문제는 예수님을 보고도, 그분의 말씀을 듣고도, 그분께서 행하시는 기적들과 사랑들을 보면서도 철저하게 의심하고 못 믿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장모의 열병이 고쳐지는 것을 보고도, 백부장의 하인이 고쳐지는 것을 보고도 못 믿은 것이지요. 그런일이 내게도 일어날 수 있음을 못 믿은 것입니다. 물론 믿음이 없으니 기도하지도 않았겠지요..

우리들에게도 이런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일어났던 기적이나 은총이 내게는 안 일어날 것 같은 불신앙이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그에게 역사하신 하나님, 성경속의 배우들에게 선을 행하신 하나님께서 마땅히 나에게도 동일한 선물과 은총을 베푸실 것이라는 믿음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이 단 일회성인 것처럼,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이미 멈추어버린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신 예수님께서 왜 내 병을 고쳐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생기지 않을까요?
베드로의 장모에게 붙은 열병을 다스리신 예수님께서 왜 내 감기는 고쳐주지 못하실까요?
믿음이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탄식하시며 저주하시는 것입니다.
애굽왕 바로는 10가지 재앙을 경험하고도 하나님을 못 믿었습니다. 바로 뿐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매일 마다 내려주시는 만나를 받아 먹으면서도 하나님을 의심했습니다. 내게 일어나고 있는 엄청난 기적들 속에서도 믿음의 눈이 감기워져 있습니다. 도무지 믿으려고 하지 않고, 순종하려고 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고, 의심과 불만속에 살아갑니다. 그러니 저주를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라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저 교회에 일어난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교회에 안 일어난 것이라는 믿음이 있지는 않습니까?
저 사람과 그 가족을 일으키시고 회복시키신 하나님께서 나와 내 가족을 든든히 서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왜 안 생깁니까? 아직도 계산하고 사십니까? 믿음으로 사시면 기적을 보게 됩니다.
믿음으로 살면 축복을 더 많이 받습니다. 그러나 의심하며 나아가면 풍랑이는 바다에서 힘들게 살게 됩니다.

말세에 믿는자를 보겠느냐는 주님의 탄식이 들립니다.
오늘 내가 살고 있는 동네는 예수님의 저주로부터 자유로운 곳입니까?
바로 내가 살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 000이 살고 있기 때문에 저주가 축복으로 바뀌는 기적을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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