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나타난 죽음과 관련된 기록들 41
성경에 나타난 죽음과 관련된 기록들 41
  • 안양준
  • 승인 2023.04.26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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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의 죽

어느 한 인물에 대해 평가할 때 일상적인 기준으로 접근할 수 없는 특별한 경우들이 있다. 그 중 하나를 들자면 수태고지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태어나기 전 천사가 나타나 출생에 대해 미리 예고하는 경우를 의미한다. 이삭이나 사무엘의 경우가 그 예라 할 수 있다.

이보다 더 특별한 경우는 수태고지에 나실인의 서약까지 더한 것이다. 이러한 예는 신구약 전체에서 삼손이 유일하다고 볼 수 있다. 사무엘의 경우 한나가 서원 기도를 드릴 때 삭도를 대지 않겠다고 한 적은 있다.(삼상 1:11) 신약 인물 중 세례 요한의 경우 가브리엘 천사가 사가랴에게 “포도주와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라는 예외 조항을 두었기에 나실인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고 여겨진다.

민수기의 나실인에 대한 규례는 첫째 독주와 포도주 그리고 포도 소산물을 멀리할 것, 둘째 삭도를 머리에 대지 말 것, 셋째 시체를 가까이하지 말 것 등이다(민 6:3-12).

세례 요한은 앞에서 설명한 경우들에 더하여 그의 출현이 구약성경에 예언되어진 것(말 4:5)이라 할 때 성경의 모든 인물 중에서 가장 특별한 예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을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눅 7:28)라고 하신 것도 그 특별함을 인정한 것이다.

그가 처음 출현할 때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하였는가? 그를 보기 위해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갔다(막 1:5)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말라기 이후 400년이 넘는 시간을 선지자의 메시지를 듣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세례 요한의 외침은 한 마디로 감동이었다. 더구나 로마제국에 의해 신음하던 백성에게 세례 요한의 출현은 그들이 간절히 바라던 메시아처럼 여겼을 것이다.(눅 3:15)

하지만 세례 요한은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지 않았다. 삼손이 나실인으로 태어났지만 자신에게 금해진 것들에 대해 아랑곳하지 않았던 것과 비교할 때 세례 요한은 항상 엄격한 삶의 자세를 유지하였다. 그는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고 했는데 보통 사람이 누리는 평범한 음식과 의복조차 제한하는 삶을 산 것이다.

그러한 세례 요한의 죽음에 대해 조명해 보고자 한다.

성경이 기록한 세례 요한의 죽음은 그 자체에 포커스를 두지 않고 예수의 소문을 들은 헤롯이 세례 요한이 살아났다며 두려워하는 상황에서 과거에 대한 회상으로 소개하고 있을 뿐이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활동하신지 오래지 않아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헤롯이 동생의 아내에게 장가든 것에 대해 옳지 않다고 한 까닭이다.

이에 대해 좀더 상세히 설명하면 당시 팔레스틴 지역은 헤롯의 세 아들이 분할하여 다스렸는데 사마리아와 유대 지역은 아켈라오가, 갈릴리 동쪽 지역은 빌립이,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은 안디바가 각각 분봉왕이 되어 통치했다. 앞에서 말한 헤롯은 갈릴리와 베뢰아 지역을 통치하던 안디바를 가리키는 것으로 헤롯은 가문을 일컫는 호칭이기에 누구나 헤롯이라 부르는 것이다. 

헤롯 안디바의 경우 그의 교활하고 간사한 성품 때문에 예수님은 그를 향해 ‘여우’라고 부르기도 하셨다(눅 13:32).

유대 율법에 의하면 형제가 후사없이 죽었을 때 그 아내를 취할 수 있지만 헤롯은 살아 있는 형제의 아내를 취했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해 본처를 버린 것이므로 간음죄에 해당한다. 그뿐 아니라 그가 취한 헤로디아는 동생의 아내일 뿐 아니라 조카이기도 한 까닭에 근친상간죄에도 해당된다. 그런 헤롯의 행동이 백성의 감정을 상하게 하였고 세례 요한은 공개적으로 비난한 까닭에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다.

헤롯의 생일 헤로디아의 딸(전 남편 빌립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었는데 헤롯이 기뻐하며 무엇이든지 달라는대로 주겠다,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고 약속한 것이다. 딸이 헤로디아에게 무엇을 구하냐고 묻자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라고 하였다. 막 6:19에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세례 요한의 죽음은 헤로디아의 각본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헤롯은 자신이 맹세한 것 때문에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곧 내게 주기를 원하옵나이다”라는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인물의 죽음이 이러한 것이다.

우리는 항상 영적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그의 특별함은 인물 자체의 특별함이 아니라 그에게 맡겨진 역할의 특별함이다. 세례 요한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세상과 동떨어진 삶을 살아야 했고, 자신의 역할이 끝난 후에 폐기 처분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담담하게 받아들인 것이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고 세례 요한이 한 말은 그런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그가 덧붙여 한 말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요 3:29)는 말은 그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대해 대단한 영광으로 생각하였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말이다. 당연히 결혼식의 주인공은 신랑과 신부이지만 신랑을 아끼는 친구의 기쁨 역시 적지 않다. 결혼식은 그런 이들에 의해 기쁨의 잔치가 되는 것이다.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어떠한가? 그 수모와 고통을 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지 않았는가? 자신이 희생제물이 되어야 죄인들의 죄가 사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아시기에 그런 죽임을 당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닌가?

세상적인 시각, 세상적인 사고, 세상적인 판단에 의하면 세례 요한은 특별한 인물이 아닌 가장 비참한 죽임을 당한 자이다. 장례를 할 때 평범한 죽음이 아닌 경우를 변사(變死)라고 하며 변사를 취급하는 장례식장이 따로 있다. 세례 요한은 끔찍한 죽음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 그는 누구보다 훌륭한 일군이었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사역을 끝까지 감당한 충성된 종이었다.

세례 요한의 삶과 죽음을 통해 우리가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물론 우리는 세례 요한과 같이 특별한 인물에 속하지 않기에 그와 같은 삶과 죽음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영역이라 하겠지만 그래도 세상만 바라보는 시각에서 영적인 것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각으로 전환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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