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나타난 죽음과 관련된 기록들 42
성경에 나타난 죽음과 관련된 기록들 42
  • 안양준
  • 승인 2023.05.03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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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부의 독자를 살리심

본문은 죽음에 포커스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심에 관점을 두고자 한다.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을 향해 가실 때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했다고 하는데 성문 가까이 이르렀을 때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는 -그 성의 많은 사람도 함께 나오고 있었다- 사람들과 마주치게 된 것이다.

성경은 죽은 자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고 간단히 소개하고 있다.

이 여인을 흔히 나인 성 과부라고 부르는데 과부는 성경에 고아와 나그네와 더불어 특별한 보호를 받아야 할 대상(신 14:29)이었다. 당시 여성 혼자서 생계를 꾸려나가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는데 유일한 소망인 외아들이 죽었다는 것은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비극의 절정이다.

창세기 34장에 유다의 며느리 다말이 막내아들을 내주기 꺼려하는 유다를 속여 시아버지의 자식을 낳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어릴 적에는 어떻게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는가 분개하였지만 여인이 그러한 일을 시도한다는 것이 어떤 심정인지 –무엇보다 죽음을 각오하고 한 행동이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두 행렬이 마주치게 된 것이다. 물론 ‘우연’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조차 모든 것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임을 알 수 있다. 원어 성경에는 ‘때에’라는 시간적 개념의 ‘호스’는 번역하고 있지만 ‘보라’라는 의미의 ‘이두’는 생략되어 있다. 이는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킬 때 사용하는 말로 정확히 번역하면 ‘바로 그때’라고 할 수 있다.

나인성을 향해 가시는 예수님의 행렬, 나인성에서 나오는 장례 행렬, 하나는 생명의 행렬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의 행렬이다. 생명을 주려 오신 예수님과 죄의 결과로 들어온 죽음의 세력이 마주치는 상황이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눅 7:13)

예수님의 반응은 불쌍히 여기셨다고 하였다. 원어상으로는 ‘창자까지 뒤틀려지는’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지만 번역에서 이를 반영하기는 어렵다. 이 여인에게 있어 독자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시기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최대한 친절하게 위로하고 그것으로 결말이라면 평범한 우리도 할 수 있는 영역이다. 그런데 주님은 “울지 말라”고 하셨다.

글을 씀에 있어 불편하게 여길 수 있는 내용을 담는 것은 서로에게 힘든 일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울다’라는 동사는 ‘클라이오’와 ‘다크뤼오’가 있는데 전자는 흐느껴 우는 것을 의미하고, 후자는 ‘소리 없이 눈물 흘리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클라이오’라고 쓰고 있다. 당연히 통곡을 했겠지. 물론 당연하다.

그런 상황에서 ‘울지 말라’고 하는 말은 섣부른 것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주님이 이렇게 명령하신 것은 단순한 위로 차원이 아니라 슬픔의 근본 원인 자체를 제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셨음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실은 이미 구약에 예고된 바 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사 53:4)

이 말씀은 우리가 당하는 질고와 슬픔에 대해 주님이 어떻게 하실 것인가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이어지는 주님의 행동이 무엇인가?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눅 7:14)

유대인의 정결법에 의하면 사람의 시체를 만지는 것은 부정한 것이다.(민 19:11) 죽음 자체가 죄의 결과이기 때문에 가까이 가서 손을 대는 것은 율법이 금하는 일이다. 그런데 아무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음에도 –죽음 이후에 무슨 도움을 청하겠는가?-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신 것이다.

율법을 정하신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스스로 율법을 폐기하시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일반적으로는 위생상으로도 시신을 가까이 하는 것은 좋지 않다. 하지만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 그런 목적으로 다가서는 것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예수님이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하시니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한다.

‘나인’이라는 이름이 ‘즐거운’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절망 가운데 나인에서 나오던 무리가 주님을 만나 슬픔이 변하여 즐거움으로 가득하게 된 것이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불교 성전에 기록되어 있다.

“부처님이 사밧티의 기원정사에 계실 때였다. 삼대 독자를 잃어버린 한 과부는 비탄에 빠져 먹지도 자지도 않고 울기만 했다. 어느 날 부처님을 찾아와 자신의 슬픔을 하소연하였다. ‘부처님, 저는 유복자를 잃고 살아갈 용기마저 잃었습니다. 저에게 이 슬픔에서 벗어날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가만히 듣고 계시던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가엾은 아주머니, 내게 한 가지 방법이 있소. 지금 곧 가서 사람이 죽은 일이 없는 집을 일곱 군데 찾아내어 쌀 한 움큼씩만 얻어 오시오. 그러면 내가 그 슬픔에서 벗어나는 길을 가르쳐 주겠소.’ 과부는 바삐 마을로 쌀을 얻으러 나갔다. 며칠이 지난 뒤 그 과부는 한 움큼의 쌀도 얻지 못한 채 맥이 빠져 부처님께로 돌아왔다. 부처님은 물으셨다.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이 있었습니까?’ 그제야 과부는 부처님이 하신 말씀의 깊은 뜻을 스스로 알아차리게 되었다. 부처님을 쳐다보는 과부의 얼굴에는 어느새 슬픔의 그림자가 지워져 있었다.”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그대로 옮긴 것이다. 위의 글은 그냥 독자가 아니라 3대 독자를 잃어버린 과부가 등장한다. 얼마나 슬플까? 그런 여인에게 사람이 죽은 일이 없는 집을 일곱 군데 찾아 쌀 한 웅큼을 얻어오라고 하는 부처님의 의도는 도대체 무엇일까? 

물론 슬픔에서 벗어날 길을 가르쳐 달라는 요구였기에 충분한 답은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비탄에 잠겨 있는 여인을 그렇게 힘들게 할 것까지는 없지 않을까? 

하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는 이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물론 예수님이 살리신 과부의 독자나 야이로의 딸이나 나사로 역시 다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땅에서 다시 살 수 있음을 보여 주시고, 자신이 직접 부활을 보여 주셨고, 구원과 천국, 영생을 선포하신 주님이기에 이를 믿는 기독교는 죽음이 지배할 수 없는 생명의 종교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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