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나타난 죽음과 관련된 기록들 40
성경에 나타난 죽음과 관련된 기록들 40
  • 안양준
  • 승인 2023.04.19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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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위에 쓰여진 글자

다니엘서에는 바벨론 제국 멸망사의 에피소드를 보여주고 있다. 물론 성경에 기록된 말씀에 대한 신빙성을 의심하지 않지만 자신들의 역사에 수치스러운 현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지 않을 뿐 아니라 성경이 기록한 기적에 관한 내용을 일반 역사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까닭에 비사(祕史)가 될 수밖에 없는 내용이라 생각된다.

헤로도투스의 「역사」를 참조하면 바벨론은 성벽의 견고함을 믿고 도시를 포위한 다레이오스 군대에게 “노새가 새끼를 낳으면” 자신들을 점령할 수 있을 거라며 큰 소리를 쳤다고 한다. 

당시 바벨론 성벽은 느부갓네살에 의해 이중벽으로 건축되었는데 내벽의 두께가 7.7m였고 외벽은 8.3m로 그 위로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가 좌우 교차하여 달릴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같은 규모의 바벨론 도성을 함락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나 성내와 관통하는 유프라테스 강의 지류의 흐름을 이용하여 수위를 낮추어 BC 539년 10월 12일, 성벽 아래를 통과해 안전하게 들어갈 수 있었으며 바벨론을 점령하기 위해 조피로스라는 자가 미리 거짓으로 망명하여 약속의 날 바벨론 성문을 열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때 바벨론 시민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을 뿐 아니라 왕궁 안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벨사살 왕을 단번에 죽였다고 한다.

이러한 일반적인 역사와 달리 성경은 비사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일반 역사의 경우 벨사살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알려져 있지 않다가 후에 고고학에 의해 밝혀져 성경의 기록이 사실이라는 점에 무게감을 더해주었다.

다니엘서 5장에 바벨론이 멸망하던 날 벨사살이 귀족 천 명을 불러 잔치를 베풀고 술을 마실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해 온 기병들을 가져와 귀족과 왕후와 후궁들이 함께 마셨다고 하였다. 그뿐 아니라 술을 마시고 금, 은, 구리, 쇠, 나무, 돌로 만든 신들을 찬양할 때 사람의 손가락들이 나타나서 맞은편 석회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이를 보고 얼굴 빛이 변하고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무릎이 서로 부딪혔다고 한다.

역사에 의하면 당시는 메데와 바사 연합군에 의해 바벨론이 포위된지 2년이 넘는 상황이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반문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바벨론 성벽의 견고함과 성내에 충분한 식량이 비축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으며 불안에 휩싸인 자들을 심리적으로 안정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감추어져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이는 추측에 불과한 것이지만 나라를 다스리는 왕으로서 그러한 조치는 오히려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벨사살 왕은 수위를 넘어 여호와의 성전에서 가져온 기병들로 술을 마셨을 뿐 아니라 이에 더해 자신들의 신을 찬양했다는 것이다. 다니엘이 그들의 신에 대해 금, 은, 구리, 쇠, 나무, 돌로 만든 신이라 표현한 것은 그에 대해 조소하는 것이지만 실제로 우상의 재료라는 것이 이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불상의 경우 대부분이 나무나 돌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그 위에 도금을 한 경우도 가끔은 볼 수 있기도 하다.

당시 사람들의 종교심은 오늘날보다 더했던 것처럼 여겨진다. 사도행전에 루스드라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을 걷게 하자 무리가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며 소리지르는데 바울은 제우스, 바나바는 헤르메스라고 하며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을 가지고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통해 그리스 신화에 신들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일들을 당시 사람들은 실제로 믿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행 17:22에 바울이 아레오바고 광장 가운데서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다니엘서가 기록될 당시 고대인들은 국가간의 전쟁은 각 나라가 섬기는 신들의 대리전이라는 생각을 가졌다고 한다. 그런 사고(思考)에서 벨사살은 남유다의 신 여호와는 자신이 섬기는 바벨론의 신에게 패한 무능력한 신에 불과했으며,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던 자신들의 신을 찬양하며 다시 한 번 그들의 도움을 받아 현재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의도에서 이러한 행동을 저질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가 술을 마시고 어느 정도 취기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그랬을 것이라 추측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신성 모독은 하나님께서 도저히 방관할 수 없는 수위(水位)에 해당하는 것이다.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에 의하면 그 그릇들은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약탈해 온 이후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결국 이러한 행동을 한 것은 그의 교만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때 사람의 손가락들이 나타나서 맞은편 석회벽에 글자를 쓰는 기이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를 바라보며 벨사살의 얼굴 빛이 변하고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무릎이 서로 부딪혔다고 하는데 이를 누미노제라고 부를 수 있다.

누미노제는 독일의 신학자 루돌프 오트의 책 「거룩한 것」에서 소개된 개념으로 ‘신비스럽고, 두려우면서도 매혹적인 것’과의 만남, 즉 ‘신비의 경험을 통한 두려움’이라 할 수 있다.

CS루이스가 쓴 「고통의 문제」에서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에 등장하는 물쥐 래트와 두더지 모울이 나누는 대화 중에 목신(牧神) 팬에게 다가가는 장면에서 “무섭냐고? 팬이? 오, 아니야, 절대 아니야. 하지만, 하지만 모울, 무섭기도 해.”라는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아무리 인간의 권력이 대단하다 하더라도 벽 위에 써가는 손가락들을 보며 벨사살이 느꼈던 감정은 누구라도 그런 경험 앞에서 느낄 수밖에 없는 감정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눈 앞에서 일어나는 초자연적 현상 앞에 신비로운 전율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누구도 해석할 수 없는 글자는 그를 더욱 당혹케 한다. 결국 다니엘이 그의 앞에 서게 되고 그 글자가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고 한다. 이것은 아람어로 정상적으로 쓰여진 것이라면 잔치 자리에 있던 자들 중에서도 읽을 수 있는 글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나님은 이를 해석하는 능력을 전한 다니엘만이 읽을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즉 신의 영역이라는 의미이다. 인간이 침범할 수 없는 고유의 영역, 생명에 관한 신비라던가 미래에 대한 예정 등은 신의 영역이다. 

손가락이 쓴 그 글은 “하나님이 벨사살에 대해 세어보고 저울질해 보아도 기준에 미치지 못하여 결국 바벨론을 메대와 바사에 넘기겠다”는 뜻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피조물들에 대해 제대로 활동하고 있는가를 살피신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이 열매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하신 사건에서도 볼 수 있다.

벨사살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알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물론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사건을 통하여 책망한다- 하나님에 대해 넘을 수 없는 수위의 불경(不敬)을 저지른 점을 용서할 수 없다. 심판은 파울에 대해 정확히 벌점을 주어야 한다. 결국 그날 밤 벨사살은 죽임을 당한다.

그런 와중에 벨사살이 다니엘에게 허락한 셋째 치리자에 대한 약속은 실제로 지켜지기도 하였지만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거대한 바벨론 제국의 셋째 치리자라면 결코 넘볼 수 없는 위대한 권한이지만 오늘밤 멸망하게 될 운명 앞에서 아무리 대단한 권력이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 땅에서 인간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실로 나약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렇기에 해 위에서 바라보는 견지(見地)에서 해 아래의 모든 것들은 헛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해 위의 존재 즉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재설정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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