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나타난 죽음과 관련된 기록들 38
성경에 나타난 죽음과 관련된 기록들 38
  • 안양준
  • 승인 2023.04.05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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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의 상황에서 보호받는 백성

우리나라 교육열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그런 까닭에 사교육 쪽에서는 명문가라는 말이 심심찮게 떠돈 적이 있다. 명문가라는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이름이라면 대단하지 않은가?

영어권에 해당하는 나라의 경우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연상케 하는 이름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일례로 존(john), 피터(peter), 제이콥(jacob), 앤드류(andrew) 등이다. 사람들이 누구나 갖고 싶어 하는 이름, 그러다보니 이제는 너무 흔한 이름이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예레미야서에는 토기장이 이야기가 등장한다.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는 것은 당연한 말이지만 “토기장이의 그릇을 한 번 깨뜨리면 다시 완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와 같이 내가 이 백성과 이 성읍을 무너뜨리리니 도벳에 매장할 자리가 없을 만큼 매장하리라”(렘 19:11)는 말씀으로 연결되면 무서운 심판과 관련된 말씀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예루살렘에 함락하고 남유다가 멸망하는 날 시드기야 왕과 백성의 고관들과 내시들과 제사장들, 기능공, 목공, 철공들이 포로로 잡혀가고 유다 성읍들을 주님이 없어 처참한 황무지가 되게 하리라는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가?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렘 22:21)는 말씀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본문은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 하나님께서 특별히 비호(庇護)한 한 가문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렘 35:1에 “여호와께로부터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레갑 사람들의 집에 가서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을 여호와의 집 한 방으로 데려다가 포도주를 마시게 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것을 볼 수 있다.

‘레갑 사람들의 집’이라 번역한 ‘뻬트 하레카빔’은 ‘레갑 족속’이나 ‘레갑 족속의 가문’을 의미한다. 그들을 여호와의 집 곧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킨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예레미야 선지자는 제사장 가문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데려온 목적은 무엇인가? 그들 앞에 “포도주가 가득한 종지와 술잔을 놓고 마시라”고 권하는 것이다. 

신실한 여호와의 종이라 불리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권하는 것 아닌가? 더구나 거룩한 성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들에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강권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대답은 “우리는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겠노라”는 것이다. 그들의 태도는 단호하였다.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와 너희 자손은 영원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며 너희가 집도 짓지 말며 파종도 하지 말며 포도원을 소유하지도 말고 너희는 평생 동안 장막에 살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머물러 사는 땅에서 너희 생명이 길리라 하였으므로 우리가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한 모든 말을 순종하여 우리와 우리 아내와 자녀가 평생 동안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살 집도 짓지 아니하며 포도원이나 밭이나 종자도 가지지 아니하고 장막에 살면서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한 대로 다 지켜 행하였노라”(렘 35:6-10)

이것이 그들이 내세운 주장이다. 자신들의 선조 요나답이 내린 명령을 지금까지 다 지켜 행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선조 요나답이 누구인가?

왕하 10:15에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이 맞으러 오는 것을 만난지라”는 말씀이 있다. 아합과 이세벨이 다스리던 시대, 그들을 징계하기 위해 사용한 도구가 예후이다. 예후를 만나러 온 인물, 여호나답이 레갑 자손이 말한 그들의 선조 요나답이다.

예후는 자신에게 주어진 귀한 사명을 감당함에 열심을 갖고 있었지만 많은 이들의 눈에는 쿠데타로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경건한 사람이었던 여호나답이 찾아와 뜻을 같이 함으로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예후의 종교개혁은 반쪽짜리 성공이었음을 알게 된다. 아합 일가를 청산하고 바알 신앙을 청산하는 일에는 열심을 보였지만 여로보암의 죄 즉 금송아지에 대해서는 척결하지 못한 것이다. 북이스라엘 왕들은 백성들이 남유다에 속한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드리는 것이 늘 불안 요소였기에 이를 대신할 방편으로 금송아지 우상을 세운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예레미야가 활동하던 시대, 남유다의 멸망이 임박해져가던 시기에 갑작스럽게 여호나답의 후예들이 등장하고, 그들의 선조 요나답이 명령한 것을 그대로 지켜 행한다는 것이다.

200년이 넘는 시간을 술을 입에 대지 않고 살아온 자들,

요나답은 바알 신앙을 척결한 자이다. 바알은 풍요의 신이다. 농경문화를 대표하는 신이다. 요나답은 자신의 후예들이 바알 종교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집도 짓지 않고 장막 중심의 방랑 생활을 살라고 명령한 것이다. 
 
삼손의 경우 나실인으로 세우셨음을 알면서도 죽은 시체를 가까이하고, 독주를 입에 대며, 이방 여인과 혼인하는 등 하나님이 금하신 일을 쉽게 저질렀다가 결국 나실인의 증표인 머리털이 잘리우고 두 눈이 뽑히고 놋 줄로 매고 맷돌을 돌리는 신세로 전락하지 않았는가?

요나답이 내린 명령은 그들에게는 나실인의 규례와도 마찬가지였다. 이를 지켜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순간의 유혹이 있었을 것이고, 그들을 넘어뜨리려는 시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현실의 어려움을 주저하지 않고 그렇게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레갑의 아들 요나답에게서 내 앞에 설 사람이 영원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렘 35:19)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 본국의 백성은 구원을 받지 못하지만 이방인이었던 레갑 족속은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보호하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는가?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 있는가?

과연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지키며 살고 있는지? 세상 부귀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지? 작은 것 하나 지키지 못하는 자들이 더 큰 것을 어떻게 지키겠다고 확신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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