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나타난 죽음과 관련된 기록들 7
성경에 나타난 죽음과 관련된 기록들 7
  • 안양준
  • 승인 2022.08.31 09: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여호수아 사후

“백성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들이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으매 무리가 그의 기업의 경내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쪽 딤낫 헤레스에 장사하였고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삿 2:7-10)

위의 말씀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영적 지도자였던 여호수아의 생전과 사후를 극명하게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즉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들이 사는 날 동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섬겼으나 그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호수아와 그와 동시대 장로들이 생존했던 세대와 그후에 일어난 세대의 시간의 간격은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당연히 한 세대가 지났을 뿐이라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결국 시간적 간격은 그리 크지 않았음에도 둘 사이에는 분명한 신앙적 단절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알지 못할 리는 없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했다는 말은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존재감이 사라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의 부모 세대가 경험했던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를 기억하려 하지 않았고 당연히 하나님과 그들 사이의 거리감은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불과 한 세대가 지나지 않아 하나님에게서 멀어져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속한 배교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성경을 통해 가나안 족속에 대한 두려움이 근본적인 원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무엇보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했던 것은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철 병거’라 할 수 있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그가 산지 주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주민들은 철 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삿 1:19)

인류 최초의 철기문화는 BC 18세기의 힛타이츠(Hittites) 민족에서 시작되었다. 사사기에서는 이를 헷 족속이라 부르고 있는데 지중해를 중심으로 무역이 발달하면서 이스라엘의 강력한 대적이었던 블레셋은 일찍부터 철기문화를 접한 부족이었다.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 13:32-33)

바란 광야 가데스라는 곳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12명 가운데 10명이 올린 보고이다. 가나안은 거인이요, 그들 앞에서 자신들의 모습은 스스로 보기에 메뚜기 같았다는 말 때문에 온 회중이 소리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다고 하였다.

그로 인해 40년을 광야에서 배회하게 된 것이다. 그 이유는 잘 아는 것처럼 불신앙의 사람들이 광야에서 모두 엎드러지기까지 가나안 입성의 시간을 연장하신 것이다.

그런데 가나안에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동일한 패턴으로 죄악을 저지른 것이다. 여호수아의 생존시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인물들이 사라진 후 가나안의 철 병거를 두려워하여 그들과 전쟁하는 대신 타협의 방법을 모색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진멸하라고 명령하신 가나안 족속과의 타협은 악과의 타협이며, 현대적으로 표현한다면 세상과의 타협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과 타협한 결과 결국 그들이 섬기는 신을 섬기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된다.

개역성경에는 “다른 신들을 음란하듯 좇아 그들에게 절하고”(삿 2:17)라고 기록되어 있다. NIV 성경에는 “prostituted themselves to other gods”라고 되어 있다. 번역하면 “다른 신들에게 자신의 몸을 팔며”라고 할 수 있다. 신앙의 정절을 저버린 자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넘겨 주사 그들이 노략을 당하게 하시며 또 주위에 있는 모든 대적의 손에 팔아 넘기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하지 못하였으며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니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삿 2:14-15)

하나님의 자녀가 신앙의 길을 떠나 세상과 타협하여 온갖 우상을 섬길 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결국 삶 속에서 노략을 당하고 대적을 당해내지 못하는 패배의 삶이 연속될 것이며 여호와께서 재앙을 내리시니 당연히 괴로움이 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이 암울한 사사기 역사의 시작이다.

구약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예표가 된다고 했다. 당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이 진멸의 대상이었다면 오늘날 교회에 있어 세상은 진멸의 대상은 아닐지라도 타협과 공조의 방식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신앙에서 떠나 세상과 타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현재 자신의 삶과 비교한다면 어떠한가? 좀더 확대하여 한국 기독교의 모습을 바라보면 어떠한가?

일제 36년간의 식민지배와 한국 전쟁의 참담한 폐허 속에서도 우리의 이전 세대들은 뜨겁게 기도하였고, 그로 인해 한국의 기독교는 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급속한 부흥을 경험하게 되었다.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 중에도 한국교회에 임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한 이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들이 사는 날 동안에는 그나마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남아 있겠지만 이 세대가 사라진 이후 다음 세대에 과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존재할 것인가에 대해 의문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

물론 오늘날 세상과 타협과 공조의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즉각적인 진노가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안심하는 자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하나님의 진노는 구원과 영멸의 방식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사사기를 읽으며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이스라엘이 심한 괴로움을 겪을 때 그로 인해 여호와를 간절히 찾으면 그때마다 구원자를 주셨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개인적으로 적용한다면 회개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세상 죄악과 타협하며 살아가다 온갖 괴로움으로 힘들 때마다 이 공식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자는 다시금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이겨낼 수 있다는 놀라운 은혜를 기억할 수 있도록 신앙의 유산을 남겨주어야 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