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나타난 죽음과 관련된 기록들 9
성경에 나타난 죽음과 관련된 기록들 9
  • 안양준
  • 승인 2022.09.14 0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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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다의 딸의 죽음

입다라는 인물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쓰임받게 된 배경은 매우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다른 사사들과 달리 하나님께서 먼저 그를 세우신 것이 아니라 길르앗 장로들이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장관이 되어 달라고 요청하고 암몬과의 협상이 결렬된 이후에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셨다고 성경이 기록하기 때문이다.

입다의 출생과 성장 배경 등에 관한 것들은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지만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입다가 암몬과의 전쟁을 치르기 전 하나님께 했던 서원의 결과 그의 딸이 인신제물이 된 사건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았으면 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사례를 과거 역사를 통해 찾아볼 수 있다.

서양 고전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는 호메로스가 쓴 그리스 연합군과 트로이의 전쟁을 소재로 하는 작품이다. 하지만 일리아드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내용이 그리스 비극의 아버지라 불리는 아이스킬로스의 작품 「아가멤논」에 등장한다.

그것은 그리스 총연합군의 수장이었던 아가멤논이 아폴론의 누이 아르테미스의 진노를 사서 그의 딸 이피게니아를 제물로 바치는 장면이다. 

「일리아드」를 읽으며 아가멤논의 독선적이고 교만한 그의 성격에 분노하는 독자들은 그의 최후가 비참하게 종식되는 것을 당연한 귀결처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신의 노여움을 푸는 방식으로 인간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것 –그것도 본인이 아닌 무죄한 자가 대신하는- 은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라 여겨진다.

또 하나의 예로 인도의 사띠(sati) 풍습을 들 수 있다. 남편이 죽으면 화장을 하는데 남편을 따라 스스로 화장대에 몸을 던지는 것을 사띠라고 한다. 인도의 카스트는 하층계급에 속한 이들에게는 최악의 굴레라 할 수 있다. 그런 제도 속에서 파생된 사띠 풍습이 희생자가 아닌 이들에게는 숭고해 보이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울 엄마 활활 타올라
저 하늘의 별이 되소서(이광수 작 「인도는 무엇으로 사는가?」 中에서)

사띠에 비하면 조선시대의 열녀문은 오히려 점잖은 편에 속한다. 물론 어느 나라의 문화를 비난하고자 하는 마음은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성경학자 중에 입다가 한 서원에 대해 그 딸을 번제물로 드리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들의 주장의 논거는 빈약하다.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 주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삿 11:30-31)

입다는 자신이 스스로 서원한 것이다. 그래서 승전하여 돌아올 때 그의 딸 –무남독녀인- 이 나와서 영접하는 모습을 보며 자기 옷을 찢으며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삿 11:35)라고 한 것이다. 마치 자기 심장을 도려내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을 것이다.

그때 그의 딸이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의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라고 하였다.(삿 11:36)

그리고 “나를 두 달만 버려 두소서 내가 내 여자 친구들과 산에 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삿 11:37)라고 하였고 돌아온 후에 “그는 자기가 서원한 대로 딸에게 행하니”(삿 11:39)라고 하였다.

성경을 읽으며 입다가 번제의 서원을 드렸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있는가? “이스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하더라”(삿 11:40)는 기록도 입다의 딸이 번제물로 바쳐지지 않았다면 이러한 애도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도대체 왜 이러한 일이 발생하였을까?

자신이 싸워 이길 승산이 없는 적과의 전쟁에 나서는 장수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전쟁에서의 패배는 자신만의 아니라 나라 전체가 멸망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패배할 경우 얼마나 심한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역사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이 입다가 서원을 하게 된 배경일 수 있다. 그럼에도 좀더 자세히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은 사사기가 쓰여지던 시대 사람들의 특징을 들 수 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17:6)

여호수아의 사후에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다”(삿 2:10)는 기록도 있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기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이 입다가 활동하던 당시 사람들의 특징이었고, 어려서부터 돕 땅에 거주하며 잡류와 함께 출입하던 입다 역시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을 거라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라는 이름 자체를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농경을 주로 하는 가나안에서의 새로운 환경이 원주민들이 섬기던 풍요와 다산의 신으로 알려진 바알을 숭배하게 된 현실적인 이유일 것이다. 그러다가 타민족에 의한 압제가 심할 때에만 다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삿 10:10)

암몬에 의해 18년 동안 압제를 당한 후에야 여호와께 부르짖지 않는가? 입다 역시 여호와와는 상관없는 삶을 살았을 것이고 암몬과의 전쟁에서 장관이 되어달라는 요청을 받은 후에야 여호와께 도움을 구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물론 암몬과의 전쟁에 앞서 협상할 때 과거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들에 대해 소상하게 알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그러한 입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무엇보다 인신제사를 가증히 여기는 하나님 앞에서, 자녀를 몰렉에게 주는 암몬과의 전쟁을 앞두고 인신제물을 바치겠다고 서원하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사실 성경 해석상의 문제로 대두되는 것 중 이만큼 논란이 되는 것도 드물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입다의 어리석은 서원과 인신제사를 받으셨을까? 물론 아니다. 하나님은 결코 받지 아니하실 뿐 아니라 이를 가증하게 여기시는 분이다.

“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하게 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8:21)

그렇다면 기독교가 말하는 순교도 인신제물과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을까?

누군가에 의해 –한 개인이든 혹은 사회 구조적인 문제이든- 희생물이 되는 것과 자기 스스로 희생을 자처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물론 하나님은 순교를 요구하지 않으시며 순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결코 일반적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배교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까지 내어놓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무죄한 입다의 딸이 번제물로 바쳐진 것이나, 사건과 전혀 상관이 없는 아가멤논의 딸이 희생제물이 되는 것, 사회 제도로 인해 힘없는 여성이 사띠 풍습의 희생물이 되는 것과 순교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줄줄 외우는 것이 아니라, 진정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생의 큰 위기 앞에서 하나님께 서원하고, 서원한 것이기에 어떠한 경우에라도 반드시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전혀 다른 것이라면 이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것이요, 이러한 잘못을 한 개인으로서 성도나 목회자가 그리고 집단으로서 교회나 기독교 단체가 결코 저질러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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