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가 말하는 생사관(生死觀)
전도서가 말하는 생사관(生死觀)
  • 안양준
  • 승인 2022.07.13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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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기억하리라

창세기 5장은 아담의 계보를 적고 있다. 

“○○은 ○○세에 ○○를 낳고 ○○를 낳은 후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는 ○○세를 살고 죽었더라”

이는 사람의 이름과 년수만 달리할 뿐 동일한 패턴으로 반복하며 한 장을 완전히 할애하고 있다. 이는 창세기 10장과 11장에 등장하는 노아의 아들들의 족보에도 비슷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이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만약 자신을 위의 공식에 적용하여 넣어본다면 어떨까? 아마 지상에서 삶을 영위했던 모든 사람들 중 이 패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특별한 방식으로 데려가신 에녹이나,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간 엘리야,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려져 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위와 같은 삶을 살다가 죽게 될 것이다.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전 1:11)

나의 삶과 죽음이 단 한 줄의 글로 남겨진다 해도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장구한 역사 속에서 과연 내 삶의 족적(足跡)을 남길 수 있을까? 족적은 고사하고 죽음과 더불어 바로 잊혀지는 존재가 되지 않을까?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사별하면 기일에나 기억을 되살릴 뿐, 그나마 그 기간도 그리 길지 않음을 보게 된다. 

“지혜자도 우매자와 함께 영원하도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모두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전 2:16)

지혜자의 삶과 우매자의 삶은 확연히 다르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의 죽음은 마찬가지라고 한다. 타인과 다른 삶을 살기 위해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이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하는 이들조차도 죽음 앞에서는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 이름을 남길만한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강력한 군사 정권으로 일국의 수장이 되고 계속해서 권좌에 머무르려 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은 어떠했는가? 재벌 왕국을 꿈꾸던 현대 정주영 회장이나 삼성 이건희 회장의 마지막은 어떠했는가?

성경이 평가하는 죽음은 무엇인가?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 산 자들은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며 그들이 다시는 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니라 그들의 사랑과 미움과 시기도 없어진 지 오래이니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 중에서 그들에게 돌아갈 몫은 영원히 없느니라”(전 9:4-6)

위의 구절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소망이라는 것도 살아있는 자들의 몫이요, 사랑과 미움, 시기조차 살아있는 자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며 죽은 자에게 돌아갈 몫은 영원히 없다는 것이다.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는 것은 죽은 존재는 하등의 가치도 없는 까닭이다. “개똥 밭을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옛말도 그런 의미다. 

도대체 죽음에 대한 성경의 이처럼 박(薄)한 평가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전도서는 지혜자였던 솔로몬이 인생 말년에 쓴 책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 점에서 동일하게 솔로몬이 쓴 잠언서와는 결이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 솔로몬이 바라보는 삶은 어떠한가? ‘전도서’하면 떠오르는 것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라는 말씀이다. 그런 점에서 솔로몬이 바라보는 관점에서는 삶조차도 그리 좋은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 1:14)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 살면서 하는 모든 활동이 다 헛된 것이요,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이 헛된 일이라고 한다면 삶 자체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이 문제의 해답은 전도서의 결론 부분인 마지막 12장을 통해 알 수 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전 12:1)

아직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는 시기인 청년의 때에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것이다. 즉 결론은 창조주와 관련된 것이다.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창조주와의 관계성을 바르게 맺지 못한 삶은 실패한 삶이요, 죽음은 더구나 최악일 수밖에 없다.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전 12:1)

전도서 12장에 젊음이 지나간 후 노년의 현상들에 대해 은유적 표현이지만 나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노년 역시 죽음이 이르지 않은 시간이기에 아직 기회는 남아 있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전 12:7)

흙은 육체를 말하는 것으로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은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것을 확실하게 밝히고 있다. 그렇게 되기 전에 기억하라는 것이다. 무엇을 기억하라는 것인가? 전도서의 마지막 구절이 제대로 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3-14)

여기서 사람의 본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솔로몬이 보여준 아름다운 인생을 다시 한 번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 3:11)

구약성경이 영원을 말하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지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지만 이를 외면하고 살아갈 뿐이다. 성경은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죽음 이후에는 기회가 없다는 것을... 그러나 아직도 생이 남아있다면 기회는 있다고...

오늘날 교회가 가르쳐야 할 부분이 무엇인가? 사람의 본분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분명히 알려야 하지 않는가?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마지막은 아름다운 끝맺음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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