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나무 서른 두 번째 이야기
큰나무 서른 두 번째 이야기
  • 이형연
  • 승인 2021.06.16 05: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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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년과 다르게 자주내린 비로 산천은 푸르다 못해 무성한 녹음으로 덮어 정글이 되었다. 산으로 향하는 길은 흔적만 남기고 온갖 들풀로 가득하다. 배로 기는 무서운 생명들이 우글거리는 산속을 걷는 것은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그럼에도 산을 찾는 것은 풀 내움과 머리 맑아지는 신선한 공기가 있기 때문이다.

바위 위 한줌의 흙을 터전 삼아 중나리가 붉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 자신의 존재를 알려 온다. 어른 주먹만 한 새끼를 한 무리 거느린 꿩이 인기척에 경계 음을 내자 계곡을 향해 새끼 꿩들이 나라 오르고 눈 깜짝할 사이에 진공상태를 이루듯 사방이 고요해 졌다. 오래전 화전을 일구었던 밭은 잡목이 자라 어른 키를 넘기고 밭가에 고목이 되어버린 뽕나무는 검붉은 오디가 한창이다. 한줌 입에 넣고 오물거리니 단맛이 마른 목의 갈증을 해결해 준다. 가지 한쪽을 털어 센터 아이들에게 가져다주고 싶지만 분명 환영 받지 못할 것이다. 요즘 아이들에게 먹을 것이 너무도 다양하고 흔하다. 허기가 사라진 시대는 귀하지도 감사하지도 않은 풍요가 지배한다. 피자나 치킨을 선호하는 아이들은 거의 밥 외에 육식만 즐기는 새로운 인류이다. 급식을 통하여 제공 되는 과채류는 내가 개입하여 편식의 주의를 주지 않는 한 거의 통째로 남는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고기반찬이 없으면 아예 저녁을 먹지 않고 거르는 아이도 흔하다. 센터 프로그램에 음식 만들기가 년 중 몇 번이 있는데 자신이 만든 음식도 입에 대지 않는 아이가 있다. 후원 받아 과자를 박스째 풀어 놓고 가져가라고 해도 자신이 선호하는 과자가 아니면 가져가지 않는다.

풍요를 꿈꾸며 앞만 보고 달려온 아버지 세대는 배를 든든히 채울 것이 가득한 세상을 열었지만 이것을 누리는 세대는 생각만큼 행복하지가 않다. 문화와 경제, 지역으로 세분 되는 격차와 상대적 빈곤은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높은 벽이 이들을 가로 막고 있다. 새로운 신분제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처럼 보이는 오늘의 현실은 부와 경쟁력을 확보한 무리들은 자신들의 세상을 구부한지 오래 되었고 남겨진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존의 치열한 경쟁이 버러지고 서로에게 승산이 없는 싸움을 멈출 수 없게 되었다.

풍요로운 듯 하지만 여전히 달레지지 않는 빈곤의 그림자가 함께하고 이것을 지우려 애쓰지만 번지는 먹물처럼 감당이 안 되는 상태라고 표현하면 적절한지 모르겠다.

경쟁력을 키우는 것이 유일한 대안으로 작용하는 한 우리는 치열한 생존의 싸움을 멈출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정신없는 자의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상생과 공존의 새로운 대안을 만든다면 우리를 이 지독한 경쟁의 늪으로 밀어 넣은 자들이나 세력들을 힘을 일시에 무력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본다. 여기에는 사람의 성숙된 의지와 관념의 토대가 필요하지만 영 불가능하지도 않은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의료나 사회복지, 공공재 등의 많은 경험을 축적하고 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나눔과 용서 섬김을 이 땅에 실천한지 백년을 넘겼다. 독재와 산업화의 그늘에서 소외 된 자들을 돌보는 것이 교회의 큰 사명 중 하나였다면 이제 공공의 영역을 확대하고 서로가 공존할 수 있는 사회 경제적 화해의 일이 또 다른 사명으로 교회에 주어지게 될 것이다. 교회마저 서로를 분류하여 크고 작음으로 나누고 신앙이 많고 적음으로 평가 되면 우리는 행복해 질수 없다. 이러한 판단의 배경에는 교회나 신앙이 소유적 개념으로 인식한 오류에 근거한다. 이것이 사적 소유로 전락하면 인간 자체의 붕괴를 가져온다. 신앙을 소유한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이 존재하는 것이다. 교회를 소유한 사람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사회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가 신앙인이고 교회이다.

여름을 등에 지고 콩을 심는 유월의 들녘을 바라보며 산이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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