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나무 서른 네 번째 이야기
큰나무 서른 네 번째 이야기
  • 이형연
  • 승인 2021.08.05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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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를 달군 열기는 한밤이 되어도 식을 줄 모르고 후덥지근한 선풍기 바람을 의지하여 자리에 누었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는다. 뜨거운 태양을 피해 아침저녁으로 일할시간을 정한 농촌의 일상은 먼동이 트는 이른 시간임에도 논밭에 사람들의 바쁜 움직임이 소리가 가득하다. 이들을 따라 함께 이른 아침을 시작하는 온갖 벌레 떼들은 농부들에게 여간 성가시지가 않다.

기피제를 뿌리고 더위와 상관없이 긴팔 옷에 장화에 수건을 목에 두르고 마스크까지 무장을 해도 벌레들의 공격을 온전히 막을 수는 없다. 일을 마치고 찬물에 땀을 씻어 낼 때면 몸 여기저기 벌레 물린 자국들이 선명하다. 한낮의 더위를 피해 낮잠을 겸한 두어 시간의 꿀맛 같은 휴식을 보내고 다시 찾은 일터는 금 새 전신을 땀으로 적시고 지는 해를 따라 다시 시작 되는 벌레들의 공격은 아침의 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강력한 공격이다. 바쁘게 놀리는 손등이라도 이들의 공격을 피하기는 쉽지 않다. 엔진소리로 요란한 예초기 작업을 하는 중에도 등속으로 파고든 이름 모를 벌레는 대여섯 군데를 물어 결국 바쁜 작업을 멈추게 했다. 한참을 긁고도 가려움은 가시지 않는다.

예배에 참여한 교우들의 사정도 나와 다르지 않음을 눈 주위를 물려 반쯤 감긴 얼굴로 애써 웃어 보이는 모습에서 알 수 있다. 나의 눈을 손짓으로 가리키며 함께 살짝 웃으며 그의 사정에 마음으로 동참하고 있음을 표시하는 것으로 의사전달은 충분하다. 내일이면 상처에 상관없이 다시 일터로 나가는 그들의 일상을 알고 있기에 요란한 위로의 세레머니도 필요하지 않고 위로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이미 기꺼이 받아들인 일상이다.

그들에게 자신들의 고단하고 성가신 일과는 슬픔이나 불행의 결과물이 아니며 거역하지 못한 운명도 아니다. 누구를 위한 다는 숭고한 기치를 부여하거나 삶의 질량을 측정하는 평가적 의미도 없다. 단지 오늘의 주어진 삶을 받아들인 뿐이다. 이들의 삶을 맛나게 하는 소소한 나눔과 고단한 일상을 함께하는 이웃이 있을 뿐이다.

삶에 성가신 일들은 육신을 지닌 인생에게 늘 상 따르기 마련이다. 일과 관계로 역어진 삶은 좋은 사람만 만나고 좋아하는 일만할 수는 없다. 내가 선택하거나 초대하지 않은 일과 사람들이 의지와 상관없이 삶에 섞이게 되어 있다. 때로 이로 인해 어려움을 격고 하던 일들이 이그러진다. 인생에게 한시도 상처 없는 일상은 없다. 인생이 온전한 것은 흔들림 없는 평화가 아니라 요동치는 일상에서 이것을 삶의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넉넉함이다.

놀랍게도 이와 중에도 삶은 아름다워지고 아이는 성장을 거듭하여 어른이 되고 식물은 농부의 손길에 의지 하여 열매를 맺어간다. 여전히 삶에 가치를 알아가는 사람들에 의해 상처로 손상 되지 않는 존엄이 반석처럼 자리하고 어둠이 침범하지 못하는 태양이 세상 도처를 비춘다. 서로를 엮는 관계의 끈이 공존의 그늘을 만들고 서로에게 아픔이며 동시에 의지가 되는 세상이 펼쳐진다.

이것을 일일이 계산에 두지 않고 세월의 흐름 속에 서로의 자리가 잡히도록 기다려주는 인생들로 인해 상처는 크게 덧나지 않고 삶의 호흡을 이어가게 되는지도 모른다. 나의 삶을 불편하게 하는 네가 있어 몇 번이고 주변을 살피게 되고 자신을 좀 더 건실하게 챙기게 되는 것이다.

서리태 콩을 심은 밭에 가리지가 콩보다 큰 키를 자랑한다. 시간을 내야하는데 더위를 핑계로 게으름을 선택한 탓에 좀처럼 밭으로 발이 옮겨지지 않고 있다. 주말에 짬을 내 풀베기에 나설 생각이다. 여름 가뭄으로 콩잎이 처져도 가리지는 자라도 너무 잘 자란다. 풀이 나지 않는 밭은 곡식도 자라지 않는다. 벌레가 없는 논밭에 결실을 기대할 수 없다. 성가신 모든 것은 삶에 함께 주어진 선물이다. 햇살이 쏟아지는 마당을 바라보며 산이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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