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나무 스물 여덟번째 이야기
큰나무 스물 여덟번째 이야기
  • 이형연
  • 승인 2021.04.22 0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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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난화의 영향 일까 벚꽃이 지자 한낮은 여름처럼 덥게 느껴진다. 아담 이래 인간은 이마에 땀이 나야 밥을 얻을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노동은 죄를 범한 인간이 겪어내야 하는 일종의 노역형이 아니다. 죄로 인해 죽을 인간을 살리는 하나님은 또 다른 배려이다. 노동은 양식을 생산하는 기능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는 도구이다. 노동은 일상의 공허에서 사람을 해방 시켜 생각을 명료하게 만들어 주고 성취의 기쁨과 감사를 알게 한다. 올해도 봄 햇살을 맞으며 작은 텃밭에 고랑을 만들고 검정비닐을 덮어 고추 심을 준비를 마쳤다. 다행인 것은 지방정부에서 농기계를 임대하는 사업을 하고 있어 로터리 치는 기계와 비닐 두둑을 만드는 관리기를 빌려와 다른 해 보다 쉽게 작업을 할 수 있었다. 몇 년 전만해도 삽으로 고추 골을 만드느라 봄은 온 몸에 근육통을 만들어 냈다. 힘든 것은 잠깐이고 청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먹는 행복의 시간이 길기에 힘든 노동을 당연하게 여기며 기꺼이 받아들였다. 새벽부터 하루 일정이 꽉 차있다는 것은 회갑연의 잔치 상처럼 즐거운 일이다.

신비하게 싹을 땅밖으로 내민 감자의 푸른 잎은 이른 아침부터 아내를 깨우는 사건이 되고 이름도 생소한 채소 모종을 가짓수대로 사서 열을 맞추어 고랑에 옮겨 심고 나면 땀은 셔츠의 목선으로부터 젖어들기 시작한다.

지인들은 아직 심지도 않은 옥수수를 수확하는 시기에 가족 휴가를 계획하고 알려 왔고 백여평을 따로 구분하여 옥수수 심을 밭을 정리하느라 점심시간이 된 것을 고픈 배가 알려 준다. 오후는 버섯 하우스에 표고목을 손보고 포도 넝쿨이 뻗을 지지대를 다시 고정하면 센터의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와 돌아가며 뭐하세요를 물어 온다.

바쁘게만 흘러가는 봄날은 어느새 흰색으로 분홍으로 피웠던 꽃을 떨구고 콩알만 한 열매가 꽃피었던 자리에서 자라 올라온다. 이쯤 되면 짧은 봄은 반팔의 소매가 어색하지 않은 시간으로 세상을 바꿔 놓는다. 계절도 농부도 성실한 노동을 삶으로 받아들이며 생명을 이어가는 고리들이 하나둘씩 만들어져 서로를 연결시킨다. 농부의 노동이 없으면 사람도 짐승도 벌레도 없다.

서울 모처의 아파트 가격이 80억 이란다.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금액이라 상상이 가지 않지만 생명이 자랄 수 없는 콘크리트 더미가 왜 그렇게 비싼지는 더 이해하기 어렵다. 소박한 노동의 만족을 저버린 사람들이 부채질로 이룩한 성과 인듯하다. 노동으로 삶을 이어가는 일반인들이 얻을 수 없는 것이기에 부러움 보다는 발이 빠지면 나올 수 없는 늪 주변에 서있는 불안이 느껴진다. 그 높은 아파트 값에는 별을 이고 밭으로 나가 다시 별을 이고 집으로 돌아오는 농부의 땀과 건축과 산업 현장의 노동자들의 땀이 고스란히 한숨이라는 이름으로 새겨진 80억이다.

땀을 기반하고 성실을 가치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회는 도적의 소굴이 되기 쉽다. 세상의 재화가 쉽게 얻어질 때는 자신의 삶이 은총 위에 있지 않고 가난한자의 눈물 위에 있지 않은지를

반드시 의심해야한다.

한국교회는 언젠가부터 물질의 부요를 하나님의 복으로 받아들였고 이를 신앙의 신실한 결과와 연결 시켜 놓았다. 이것을 인정한다고 하다라도 개별적인 부요가 아니라 더불어 누리고 나누는 부요일 때 하나님의 복일 것이다.

땀을 알지 못하는 자는 나눔을 알기가 어렵고 감사는 더 어렵다. 장성한 아들의 손에 호미 한자루 들려주어야겠다. 그도 땀의 가치를 받아들일 나이가 지나가고 있다. 성도들에게도 쉽게 살지 말라고 가르쳤다. 악은 고단한 선과 어울리지 못한다.

봄이 고단한 것은 선한 열매를 맺으라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햇살 춤추는 푸른 대지를 바라보며 산이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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