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나무 스물 일곱 번째 이야기
큰나무 스물 일곱 번째 이야기
  • 이형연
  • 승인 2021.04.08 17: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벚꽃이 피는가 싶더니 이내 눈이 내리듯 바람을 타고 꽃잎이 휘날리고 있다. 벚꽃이 질 무렵이면 부활절의 반짝 신앙도 끝이 나는지 매년 식상한 이벤트는 계란과 떡을 담았던 바구니처럼 비어 버린다.

풍요가 선사한 평안을 누려온 시대는 성가신 잔손이 가는 일들은 되도록 안하려는 세상이고 보면 고난의 끝에서 마주치는 부활의 영광은 ‘극한 직업’ 주인공들이나 선택하는 신앙의 특별한 영역인지도 모른다. 예수의 고난은 나를 대신한 고난으로 고백하지만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일은 다른 이의 몫으로 전가 되고 더한 풍요를 요구할 뿐이다.

오목눈이의 둥지에 탁란 되어 깨어난 뻐꾸기 새끼 만양 붉은 주둥이만 힘껏 벌리고 있으면 주님은 이를 채워주시는 분으로 착각을 일으킨 시대의 고난과 부활은 별다른 흥미가 아니다. 새로 시작한 TV 드라마만도 못한 흥미와 기대감으로 세상을 설득하기는 쉽지 않다.

시골까지 찾아든 떠돌이 약장수도 나름의 전략으로 노인들에게 접근하여 이윤까지도 챙기지만

고단한 삶을 선택한 사람에게 사람의 시선이 머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이윤이 지배하고 욕망이 팽배된 사람들 속에서 의와 사랑은 비난과 조소의 대상일 뿐 설자리가 협소하다. 무력하게만 보이는 이들의 삶은 공룡이 되어 버린 인간의 이기 앞에서 참패를 경험하지만 끈질기게 생명을 이어가는 억센 식물의 뿌리처럼 다시 싹을 틔우고 때때로 꽃과 열매를 맺는 것은 하나님의 신비에 속해 있다.

십자가의 죽음 앞에 무력하신 주님처럼 부활 앞에 어둠도 무력한 것은 오늘 의를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유일한 용기이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나 이스라엘의 최고의 인물인 다윗은 거대한 힘을 소유하거나 권세의 사람이 아니다. 소박하고 평범하기 이르대 없는 이들이 세상의 풍파 앞에 하나님을 의지해서 서 있을 뿐이다. 냉혹한 세상은 이들에게만 호의적인 적은 없다. 도리어 일반인이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 이들을 감싸고 돌았다. 이들 속에 신련을 견딜만한 힘이 존재했다고도 믿기 어렵지만 이들을 승리의 주인공으로 세워 가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도처에서 발견 되어질 뿐이다.

교회는 예수의 삶을 감상하며 탄식하고 슬퍼하고 환호한다. 부활은 무대 위에 올려 진 예수의 삶을 우리의 삶에 현실 안으로 끌어내려 우리를 당혹하게 하는 하나님의 사건이다. 예수의 고난을 자신의 삶으로 선택한 자들에겐 부활은 영광과 감동이 되지만 평안의 자리에 누워 이를 감상하던 자들에게 있어 서는 불안과 허위의 노출로 인한 부끄러움이다.

예수의 죽음 앞에 인간의 양심이 통곡을 만들 듯 예수의 부활 앞에 인간의 허위가 허물어지고 옷 벗는 진실을 만들어 낸다.

생명의 부활을 준비하는 농부의 얼굴은 먼지와 땀으로 범벅되어 하루를 보낸다. 부활의 씨앗은 눈물 없이는 뿌려지지 않는다. 이들은 폭풍우 치는 밤을 보내야하고 살을 태우는 뜨거운 태양 아래 놓여야한다. 선한 길을 가는 것이 행복이라고 가르칠 수 있으나 평안이 따르는 쉬운 길이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이 가난하고 어려운 길을 스스로 선택하신 주님과 친구 되어 거친 길을 갈 뿐이다.

지난해 여름 밤새 많은 비가 내리고 한창 열매를 키워가던 살구나무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주 가지 둘을 잃었다. 남은 한 개의 가지로 용케 한 해를 버티고 어느 해 보다 많은 꽃을 피웠다. 상처 입은 나무 아래서 부활의 의미를 되 내이며 종탑 위에 은색으로 빛나는 십자가를 바라본다. 봄은 부활의 계절이다. 그리고 눈물의 계절이다.

햇살이 부서지듯 내리는 산이실에서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