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종
파종
  • 윤미애
  • 승인 2019.04.10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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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되면 이웃들의 손이 분주해집니다. 농사를 준비하는 부지런함이 여기저기에 흔적을 남기지요. 그 덕에 풍경이 하루하루 조금씩 달라집니다. 논들이 모습을 달리하기 시작했어요. 벼를 베고 남은 밑동이 가득했는데 그새 갈아엎었네요. 씨앗을 뿌리기 위해 갈아엎은 밭들은 아주 정갈한 모습을 하고 있어요. 잡초를 일일이 뽑는 수고를 덜기 위해 검은 비닐을 줄지어 깔기도 했어요. 무엇을 심느냐에 따라 밭을 가는 시기가 달라 아직 갈지 않고 겨울을 담고 있는 밭, 곱게 갈아엎고 봄을 준비하는 밭이 어우러집니다.

그런데 벌써 초록으로 빛나는 밭이 있습니다. 그 밭은 도대체 어떤 비밀을 가지고 있는 걸까요? 시골에 살아보신 분들은 이미 답을 알고 계실 겁니다. 바로 마늘밭입니다. 저도 마늘밭을 보고 깜짝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황토색 사이에 홀로 초록인 그 밭의 정체는 뭘까 궁금했지요. ‘이제 겨우 봄의 시작인데 어떻게 벌써 싹을 틔우고 저렇게 자라고 있는 걸까?’

알고 보니 마늘은 겨울을 견디는 식물이라고 합니다. 가을에 씨를 뿌린대요. 그리고는 얼지 말라고 짚이나 왕겨 등으로 덮어준답니다. 그러면 봄이 기지개를 켤 무렵, 다른 친구들은 아직 파종도 안했는데 마늘은 싹을 내기 시작한대요. 비라도 와주면 쑥쑥 자라며 마늘종을 선사하기도 하고 6월이 되면 수확의 기쁨을 누리게 해준답니다.

가을에 씨앗을 심는다는 것, 엄청난 일 아닌가요? 겨울을 견딜지 어찌 알고요. 아니, 씨앗을 심는다는 것, 그것 자체가 믿음의 행위라는 생각이 듭니다. 씨앗이 어떻게 될지 모르고 그저 믿음으로 씨앗을 뿌리는 거니까요.

상추처럼 금방 수확할 수 있는 것은 그나마 나아요. 가을에 심고 겨울을 견디는 작물들, 봄에 심고 가을에야 거둘 수 있는 작물들은 좀 더 많은 믿음이 필요하지요. 게다가 여러 해를 보내야 겨우 열매를 얻을 수 있는 과실수들은 말해 무엇합니까?

한편 농사를 짓는 것은 덜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열매를 보기 위해 더 오래 견뎌야 하는 일, 열매가 무형의 것이어서 쉽게 보이지 않는 일도 많으니까요. 예를 들어 아이를 키우는 일, 자기성장을 위해 노력하는 일들 말입니다. 기도도 그 한 예입니다. 씨앗을 심기는 하는데 응답 혹은 성령의 열매 등이 눈에 보이지 않을 때가 많지요.

다음의 말이 혹 우리에게 위로가 될까요?

“네가 저녁에 수확한 것으로 하루를 판단하지 마라. 네가 뿌린 씨로 하루를 판단하라.”

보물섬을 쓴 영국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이 한 말입니다.

문득 천의 얼굴을 한 라미란 배우가 들려준 자신의 무명시절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지금은 무엇 하나 빠지지 않고 잘 하는 그녀지만 무명시절에 생각했답니다. 자기 같은 얼굴로 드라마를 하기는 힘들 거라고. 하지만 영화가 너무나 하고 싶었답니다. 그래서 자기소개 프로필을 만들어 여기저기 막 돌렸답니다. 물론 연락이 오는 곳은 없었고요. 6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아기를 출산한 그녀에게 어느 날 전화가 왔대요. 오디션을 보러오라고. 오디션 보러가면서 캐스팅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는데 그 영화가 바로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랍니다. 박찬욱 감독에게 좋은 평가를 받으며 서서히 입지를 굳혀나가고 오늘날 믿고 보는 배우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지요.

오늘도 내키지 않는 일을 하러 가면서 생각했습니다. 나는 씨를 뿌리러 나가고 있다고 말입니다. 이런 나에게 시편 기자가 말을 건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사람은 기쁨으로 거둔다.” (시126:5)

그런데 이렇게 말해도 믿을 것 같지 않았나봅니다. 의심하며 주저하기 좋아하는 나의 본성을 잘 알고 있던 것이지요. 그래서 다시 한 번 말해 줍니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사람은 정녕, 기쁨으로 단을 가지고 돌아온다.” (시126:6)

예, 작물에 따라 파종이 다르듯 우리의 파종도 저마다 다를 겁니다. 인생의 어떤 시기를 사느냐에 따라, 내가 살아가는 인생의 결에 따라 씨앗의 종류도 뿌려야 하는 때도 다르겠지요. 허나 분명한 것은 씨를 뿌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언젠가 기쁨으로 단을 거둘 거라는 믿음으로. 아니, 내가 그 열매를 먹지 못하더라도 후손들이 먹게 될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어떤 씨를 뿌리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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