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는’ ‘이제는’
‘전에는’ ‘이제는’
  • 이구영
  • 승인 2012.02.24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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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목사님 서신의 특징적인 단어 가운데 하나가 '전에는’‘이제는’입니다.
전에는 무익한 자 이었으나 이제는 유익한 자가 되라고도 합니다. 옥중서신에 특히 많이 나오는 이 단어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에는 믿음의 세대 단절 위기에 있습니다. 부모의 믿음이 자녀에게 내려가지 않고 있습니다. 모태 신앙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거나 형식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유 중에 하나가 구체적인 하나님 만남, 구원의 체험이 없습니다.
교회에는 오래 다녔는데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생활은 오래 했는데 감사와 기쁨, 그리고 의와 희락과 평강이 없는 이들이 있습니다.
공통점은 구원의 확신과 하나님 앞에서의 결단이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세월을 많이 보냈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첫째로, 내가 얼마나 큰 죄인 인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허물과 죄로 인해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임을 고백할 수 있을 때 그는 구원의 첫 문을 통과한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 중에 아직도 내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인지, 내가 ‘죄’ 앞에서 얼마나 무능하고 약한 사람인지를 처절하게 공감할 수 없다면 그는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결코 교회 다닌 햇수가 나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내가 죄인임을 날마나 인정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둘째로, 내가 공중권세 잡은 자의 세력안에 있고, 내가 진노의 자녀이고, 내가 세상 풍조를 따르는 사람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돌이킴이 가능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의 성공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 냥 착각하기도 합니다. 육체의 욕심은 결코 하나님의 선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수고 돌아서야 하는 나의 바벨탑 임을 알아야 합니다.
셋째로, 그런 나를 하나님께서 사랑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죄인된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구원자 예수님을 보내주신 사랑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우리에게 구원은 없습니다. 구원은 사랑을, 예수님을 주인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선물로 받아들일 때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은혜는 눈물이 아니라 변화입니다. 변화가 없다면 거짓입니다. 순간적인 체험도 중요하지만 이것을 꾸준히 끌고 나갈 수 있는 용기와 성실함이 더 값진 것입니다. 그러려면 자의식이 필요하겠지요
내가 그리스도안에서 새로 태어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의식!
비록 몸은 이 땅에 있지만 결국 저 하늘을 상속받을 사람이라는 자의식!
‘전에는’ ‘이제는’ 이 두 단어는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사는데 아주 유익한 단어입니다.
변화되어가고 있습니까?
성숙되어가고 있습니까?
예수님 닮아가고 있습니까? 이런 류의 질문은 곧 이것입니다.
‘전에는’ ‘이제는’ 이 두 단어의 의미를 이해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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