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춤법
맞춤법
  • 김재용
  • 승인 2018.05.10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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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국어 시간 수업이 재미있던 때가 있었다. 용비어천가, 훈민정음 등에서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글자가 언제 사라졌는지 어느 시대에 작성되거나 변형이 되었는지를 간략하게나마 공부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면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당시 성경에 한자적 표현과 딱딱한 말투가 이해되어 성경통독이 재미있었던 때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소학교를 나오셨고, 나는 국민학교, 내 아들은 초등학교를 다닌다. 같은 나이에 다니는 학교지만 시대에 따라 명칭이 바뀌었다. 또 운동장에서 조회를 하고 수업을 들을 때는 “우리들은 1학년”을 수업하면서 시작했는데, 지금은 교과에 그런 내용이 없고, 산수 책은 과목명이 변경되었다.
고리타분한 옛날의 향수를 얘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중에 획기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이야기 하고 싶어서다. 그 사이에 “했읍니다.”에서 “했습니다.”로 표기가 변화했다. 처음엔 ‘읍니다.’로 해야 하나 ‘습니다.’로 해야 하나 고민도 하고 복잡했는데 이제는 계속 사용하다 보니, ‘읍니다.’로 타이핑을 하면 워드 프로그램이 알아서 ‘습니다.’로 교정을 해 주는 시대를 살고 있다. 심지어 방금 전에 기록한 ‘국민 학교’는 한번에 ‘국민 학교’라고 치면 자동으로 초등학교로 변환되어 자동 변환되지 않도록 한 칸을 비우고 타이핑을 한 글이다.

짧은 내 삶 속에서도 이런 변화가 있었는데, 현재의 70대 후반의 인생을 사는 분들은 일본침략기, 한국전쟁, 폐허가 된 조국, 그리고 가난 속에서 시작된 경제 발전과 현재의 문명적 발전과 I.O.T.에 이르기 까지 수많은 변화를 경험한 세대이다. 변화의 속도를 맞추기에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해 본다.

우리 교회에 횡문근육종과 투병하는 암환우 준교 학생의 보호자인 할머니는 한글을 배워본 적이 없고 학교 앞에도 가보지 못한 분이다. 처음에는 이 사실에 대해서 몰랐는데, 카카오 톡을 주고 받다보면, 더러 헌금봉투에 써진 글을 읽다보면 소리 나는 데로 써서 주신다. 처음에는 맞춤법도 단어도 모두 틀려서 무슨 일일까 생각뿐이었는데, 나중 알고 보니 학교 교육을 받지 않고 성경을 읽는 것을 옆에서 듣고 성경을 읽어보고 하면서 터득하면서 스스로 한글을 배운 경우였다. 너무나 가난한 삶이었기에 열세 살부터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현재에 이르렀다. 그런 말씀을 듣고 속으로 많이 부끄러웠다.
더욱 놀라운 일은 이분의 언니를 심방했는데, 그분도 마찬가지였다. 놀라운 자매들이다. 그리고 나를 더 놀라게 한 일은 언니 분은 공장 출퇴근하는 버스에서 메모를 하면서 글을 쓴 것을 책으로 출판했다. 그리고 내게 그 책 한권을 심방 온 기념으로 선물로 전해 주었다. 받아서 읽어보니 이 자매의 과거를 알고 한글 실력을 알기에 페이지 마다 감동적이었다.
일반적으로 글을 잘 쓰고, 띄어쓰기와 맞춤법도 상당한 실력으로 잘 아는 사람이 글을 쓰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습니다.’로 안 쓰면 어떻고 소리 나는 데로 안 쓰면 어떠랴? 맞춤법을 못 맞춰도 교정하는 사람이 봐주면 되는 것이다. 문제는 나의 인생의 스토리 다시 말해 나만이 갖고 있는 컨텐츠(contents)를 세상에 발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엄마의 헌금봉투도 매한가지다. 글씨도 많이 틀리지만 손주 사랑하는 마음을 듬뿍 담아서 매주 하나님께 마음을 드린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을 담아 은빛 지혜자들의 서툰 맞춤법과 띄어쓰기라도 아니 소리 나는 데로 쓴 그 자체로라도 인생을 글로 적어 보관할 수 있다면, 공장에서 십대의 삶을 보내고 나중에 고통스러운 날 들 속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여기 왔노라고 다윗과 같이 노래할 수 있지 않겠는가? 소중하지 않은 들풀이 없다고 하는데 이 땅의 생명 가운데 값없는 삶은 없다. 우리 인생의 기록을 남겨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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