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占), 성경에선 가증한 행위로 엄격 금해
점(占), 성경에선 가증한 행위로 엄격 금해
  • 정택은
  • 승인 2017.12.28 09: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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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아직 전개되지 않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 불안을 느끼며, 미래에 대해 알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 욕망을 해결하고자 몇 가지 시도한다. 그것이 철학으로 불리든(운명철학), 학문으로 불리든(역술), 운명의 신비로 불리든(사주팔자)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바로 점(占)을 친다. 새해가 시작되면 올 한해의 운세를 알고 싶어 이곳저곳을 기웃거려본다. 심지어 기독교인들조차 이런 유혹에 현혹되어 왜곡된 신앙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그러나 이는 불신앙적인 태도이다. 성경은 점, 복술, 길흉 등을 알아맞히려는 시도를 이방인들의 가중한 행위로 간주하고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겔13:6).

최근 염려스러운 것은 이 점(占)이 문화로 옷을 입고 우리의 일상에 너무 가까이 다가와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일간지, 스포츠신문, 각종 잡지, 그리고 인터넷 등에 무차별적으로 자신을 드러내 놓고 활동을 한지 이미 오래 되었다. 공영방송에서도 역술가들을 등장시켜 한해의 국가의 국운을 점치는 것을 방영하기도 했다. 또한 국내 굴지의 회사들이 운영하는 포털사이트들에서도 아무런 의식 없이 운세사이트 등을 상품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들 모두가 하나같이 운명을 제대로 알려준다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어 보인다. 이처럼 요즘 점이나 운세 그리고 사주 등이 예전과 달리 오락이나 대중문화의 한 단면으로 현대적인 옷을 입고 우리에게 다가서고 있다.

오늘날과 같이 과학이 발달한 시대에도 점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왜 일까? 과학은 이미 일어났거나 일어나고 있는 자연 현상에서 일정한 규칙을 발견해 낸 후 미래에도 자연계 안에서 그 규칙에 따라 동일한 현상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는 데 목표가 있다. 과학의 능력으로 자연계의 미래에 대한 예측은 상당한 성과를 거둬왔다. 그러나 인간의 행동은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결단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에 인간의 행동에 대한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과학으로도 인간의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기는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첨단 과학의 시대에도 점치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타락한 인간이 처해있는 실존적 상황은 인간이 고통 중에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겪는 가장 큰 고통은 생존과 안전의 위협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은 종신토록 땀을 흘려야 먹을 수 있는(창3:17-19) 생존의 문제가 생겼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남으로써 안전의 문제가 발생했다(창4:14). 또한 삶속에서 예기치 못하고 동시에 통제할 수 없는 일들 예컨대 죽음, 이별, 질병, 재난 등도 이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문화와 인종을 초월해 지구상 곳곳에서 미래를 예기해보려는 시도들이 일어나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생존과 안전을 확보해 자신의 통제권 안에 두길 원한다. 또한 재물을 확보함으로써 통제하지 못하는 일의 발생에 대한 대책을 세운다. 그런데 성경은 생존과 안전의 기초를 눈에 보이는 물질 대신에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두라고 요구하신다. 안전의 기초가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시18:2).

하나님께서는 장래사를 알지 못하게 하셨고(전7:14; 10:14; 사41:21-24), 온갖 형태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술수와 점성술을 금지하셨다(신18:10-12). 하나님만이 장래 일을 아시며(사45:11), 예기치 못하는 장래에 대해 하나님께 의뢰하도록 요구하신다(시37:23-24).

점이든 사주든 그것이 갖는 문제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장래에 대해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스스로 예기해 피할 것은 미리 피하고 길하며 복된 길로 찾아가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경영하겠다는 태도이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계획할지라도 하나님께 의뢰할 때 그분께서 인도하시고 경영하신다고 기록되어 있다(잠16:3,9).

인간이 미래를 들여다보려고 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미래의 불안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인간은 두 가지 때문에 불안해한다. 한 가지는 ‘영원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이다. 여기에서 해방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것이다. 이는 곧 영원한 형벌에서 해방되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둘째로는, ‘미래에 흉한 일들을 만나지 않을까’하는 염려 때문이다.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언제나 “각양각색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주시는 분(약1:17)이심을 믿고, 편안한 마음으로 미래를 맞는 것이다. 비록 미래에 우리가 예측하지 못한 시련을 주신다 해도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오히려 그 시련을 기쁨으로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약1:2).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미래를 들여다보지 못하게 하신 이유 중에 하나는, 미래에 관한 지식은 결코 인간에게 유익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믿는 자들에게 오직 좋은 것으로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서 미래를 들여다보지 않게 하신 것이 곧 선한 선물임을 인식하는 것이 바른 태도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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