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의 아킬레스건
모세의 아킬레스건
  • 이구영
  • 승인 2017.02.02 19: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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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에게는 형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론이라는 형입니다. 갓난 아이 시절에 헤어졌다가 성년이 되어서 다시 만난 형입니다. 그리 많이 배우지 못한 형입니다. 잘 나가는 동생을 이용해서 자신의 안위를 지키고 싶어 하는 형입니다. 동생의 돈을 조금이라도 더 쓰고 싶어 하는 형일 수도 있습니다.
형 아론은 모세가 시내산에 하나님을 만나러 올라간 40일동안, 대신 민족을 인도해야 하는 중책을 맡았던 사람입니다. 아론은 하나님의 뜻도 모세의 뜻도 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백성들을 더 무서워 했습니다. 데모를 하며 아론 물러나라고 외치는 백성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다 해줍니다.
백성이 원하는 대로 다 해주는 지도자! 다수결에 따라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지도자! 얼핏 보면 좋아 보이지만 참 나쁜 사람들입니다. 다수가 원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안된다고 하고, 설득도 하고, 미래를 위해서 좋은 일이 아니면 거절할 줄도 알아야 지도자인데 아론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2인자로 만들어준 동생을 배반합니다. 하나님을 배반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과 아론이 합작을 해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고, 아론이 함께 하는 가운데 사람들이 금송아지에게 절을 하면 이게 우리를 인도한 하나님이라고 선포식도 하고 찬송까지 하였습니다.

나중에 이 모든 배역죄를 알게 된 모세는 답답했습니다.
형 아론을 꾸짖습니다. 왜 이렇게 하셨느나고!! 아론은 잘못했다고 시인하지 않습니다.
그저 핑계만 댑니다.
이 백성이 얼마나 악한 사람인지 동생도 잘 알지 않느냐고. 이들이 나를 죽일 것 같아서 그냥 이렇게 했다고 난 그저 그들에게 금을 가져오라고 했을 뿐이라고..
출애굽기 32장 24절은 기록합니다.
[출 32:24]
“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 ”

금을 불에 던지면 송아지가 나옵니까? 회의를 하고, 세공업자를 뽑고, 송아지 틀을 만들고 다 작업을 해야 되쟎아요. 그걸 누가 했겠습니까? 결국 최종 책임자는 아론입니다.
그런데 그는 죄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 혼자 살 궁리만 합니다.
한 없이 무능하고 무책임한 형 아론!

형 뿐이 아닙니다. 조카들은 더 합니다.
제사장으로 임명을 했습니다.
적극적으로 도와주면 좋겠는데 오히려 발목을 잡습니다. 온갖 특혜는 누리려고 하면서 일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제사를 드릴 때 힘들어도 꼭 번제단이라는 곳 까지 가서 거기서 불씨를 가져다가 제물을 태워야 하고, 그 번제단이라는 곳에서 예물을 잡아야 하는데 귀챦아졌습니다.
편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줄 알면서도, 모세 삼촌의 뜻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냥 하나님께서 명하지 않으신 불을 가지고 예배를 인도합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술을 먹어서는 안되는 제사장이 술을 먹고 거룩한 곳에 들어갔습니다.
1년에 한번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지성소에도 두 아들은 들어갔습니다.
조카들의 헛된 행동들 때문에 모세의 망신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십니다. 그래서 두 조카 나답과 아비후가 죽습니다.

형 뿐이 아닙니다. 누나 미리암도 대단합니다.
보통 잔소리가 심한 것이 아닙니다. 지식도 없고, 경험도 없으면서 누나라는 이유만으로 잔소리를 해 댑니다. 모세가 결혼을 하자 또 시비를 걸어옵니다. 돈 대주고, 살게 해 주는 동생인데 고맙다는 말은 한 마디도 못하고 누나라고 와서 엄마 행세하며 잔소리까지 퍼 부어댑니다.

혹시 이런 분들 계세요? 가까운 친척들 때문에 아파하고 인연 끊고..
그런데 아세요? 모세는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그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습니다.
모세는 그들을 감당하려고 합니다. 거절하지 않고 애를 씁니다. 저는 이 모세가 참 존경스럽고 흉내내고 싶어집니다. 그게 그리스도인의 길이고 하나님의 뜻이니까..
[사 58:6-7]
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않는 것을 금식하는 것 보다 더 중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는 육신의 동생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예수님께서 전도여행을 시작하시자 예수님이 미쳤다고 떠들던 동생들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가장의 일을 해 오던 예수님이 집을 떠나 전도를 시작하시자 동생들은 원망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돈은 누가 벌고, 심부름은 누가 하고..
예수님께서 부흥회 하시는 곳에까지 찾아와서 다시 집으로 가자고 이야기 하던 동생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이런 저런 과정을 거치면서 마침내 그 동생 중 야고보라는 동생을 후계자와 같이 세우고, 그 야고보에게 성령이 임하시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고, 예루살렘 교회의 부목사님이 되어서 담임목사님인 베드로와 함께 교회를 세우는 큰 기둥이 됩니다.
피하고 싶었던 골육을 피하지 않고 사랑으로 인내하며, 손해 보며 참아내셔서 마침내 인물을 만들어 내시고, 그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목사님을 통해 우리들에게 주신 말씀이 그 유명한 야고보서입니다.

야곱의 네 번째 아들 유다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첫째 아들이 결혼을 한 후에 곧 죽습니다. 시집온 며느리 다말은 난감해졌습니다. 이제 유다가문의 며느리가 되어 유다가문의 씨를 이어내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여자가 남편이 죽자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일부다처제 시대이었습니다. 오늘의 윤리기준으로 평가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유다는 당시의 풍습에 따라서 며느리 다말을 둘째 아들 오난에게 다시 시집보냈습니다. 한 집안에 들어온 며느리는 소유권이 친정이 아니라 시집에 있었습니다. 시집식구들은 이 며느리를 딸로 받아들여야 했고, 자녀를 낳고 한 가문을 이루도록 도와야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이미 결혼한 둘째 아들이었지만 당시 풍습에 따라서 다말이라는 형수를 새로운 아내로 맞이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난이라는 이 둘째 아들이 그 의무를 감당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형수를 돌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혼자되어 힘들게 살아가야 할 형수를 돌보지 않고 자기만을 생각하며 살았던 오난과 그의 아내!
하나님이 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난을 악한자로 정죄하시고 그를 죽이십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형제가 어려울 때 돕지 않았다고!!
물론 모든 것을 우리가 다 책임질 수는 없습니다. 한계가 분명히 있고, 다른 상황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요1 3:14-17]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요1 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내 발목을 잡는 형제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한 믿음의 선배들이 이 설 명절에 더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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