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이 고맙습니다
부끄러움이 고맙습니다
  • 이구영
  • 승인 2016.06.24 07: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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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이 있습니다.
부끄러움을 느끼면 어떤 사람들은 얼굴이 빨개지기도 합니다.
흉악한 죄를 지은 사람들을 잡아 갈 때도 보면 마스트 등으로 얼굴을 가려 줍니다.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이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은 아주 좋은 선물입니다.
공부를 못하는 것이 부끄럽다고 느껴지면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외모에 자신이 없고 부끄럽다고 느끼면 가꾸고 수술이라도 합니다.
실력이 모자라다고 느끼면 부끄러워지고 그 부끄러움은 나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죄를 짓고 나면 부끄러워서 숨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 아담과 하와가 숨었고, 밧세바와의 불륜이 드러난 다윗이 회개했습니다.
어쩌면 이 부끄러움은 사람을 성숙하게 하고, 옳고 그름에 민감하게 하는 순기능이 있기에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주신 크나큰 선물 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마귀는 이 부끄러운 감정 자체를 부인하게 만듭니다.
아파트 단지 안에서 큰 소리로 떠들면서도, 고성방가를 하면서도 부끄러운지 모릅니다.
죄를 짓고도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자기 변명을 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술주정을 하면서, 자녀들 앞에서 부부싸움을 하면서, 부정부패와 스캔들에 연루되어 있으면서도 부끄러운지 모르고 당당합니다.
어떤 이들은 서울 시청앞 광장에서 퍼레이드를 벌리고 축제도 엽니다.
이제는 죄가 죄로 여겨지지 않고, 소수의 인권이고, 개인의 권리가 되어 버렸기에 그 어떤 죄도 정당화 하려고 합니다.

부끄러움이 사라진 시대가 되었습니다.
공부를 못해도 당당합니다.
불륜이 드러나도 걸렸다는 것에 대하여, 배신당했다는 것에 대하여 억울해 합니다.
무당횡단을 하고도, 이런 저런 단속에 걸리고도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모르드개와 유대인을 죽이려 했던 하만이 왕비 에스더의 잔치에 이틀연속 참여합니다.
왕이 에스더에게 에스더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고, 에스더의 대답 때문에, 살인교사자로 지목된 하만은 이제 죽음의 위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급기야 에스더를 강간하려고 하는 하만을 왕이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왕은 체포 명령을 내렸고, 호위대에 의하여 하만이 잡혀갑니다.
성경은 이 잡혀가는 장면을 하만의 얼굴을 쌌다고 표현합니다.
죄수들의 얼굴을 쌌다는 말은 이제 곧 죽는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의 부끄러움이 너무 크다는 뜻으로도 받아들여집니다.
하만이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부끄러움은 결국 두려움을 몰고 옵니다.
부끄러움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부끄러운 감정이 일어날 때 즉시 회개하고, 수정하고, 방향을 돌이키지 않으면 두려움이라는 극한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이 부끄러움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시기에 미리 경고해 주시는 노란불입니다.
노란불에 멈추면 빨간불에 건너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노란불을 무시하면 적색등에 지나게 되어 불법자가 됩니다.

부끄러운 감정은 노란불입니다. 경고등입니다.
적색등이 켜지고 범죄자가 되고 두려움이 몰려오기 전에 나를 바른길로 인도하는 경고등!
부끄러운 감정 앞에 정직해지고 인정하고 방향을 바꾸는, 그릇 가던 길을 멈추는 부끄러운 감정이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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