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에 생각하는 ‘회개’의 의미
사순절에 생각하는 ‘회개’의 의미
  • 이정순
  • 승인 2024.02.26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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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의 수요일 예배에 재로 십자가 표식을 하는 모습(출처:위키미디어커먼스)

올해도 어김없이 사순절이 시작되었다. 전통적으로 교회에서는 ‘재의 수요일’에 교회에 모여 사순절로 들어가는 특별한 의식을 거행해 왔다. 지금도 개신교 일부 교회, 성공회, 가톨릭교회 등에서 이 예식을 거행한다. 재의 수요일이 오면 직전 해 종려 주일에 사용했던 마른 ‘종려 가지’를 태워 재로 만든 다음, ‘재의 수요일’ 예배 때 사용한다. ‘재’는 회개, 참회, 겸손을 상징한다. 이날 예배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 고난, 죽음을 집중적으로 묵상하면서, 삶 속에서 겸손히 예수의 길을 실천해야 하는 사순절의 의미가 강조된다. 이렇게 사순절은 40일간의 영적 심화기로 들어가는 일종의 통과의례 같은 것이다.

‘재의 수요일에’ 목사나 신부는 신자들을 단 앞으로 초청하여 머리 위에 재를 올려주거나 아니면 이마에 ‘재’를 십자가 모양으로 그려준다. 그러면서 ”인생아 기억하라. 그대는 흙에서 왔노니 다시 흙으로 돌아가리라”고 선포한다. 이것은 인간의 유한성을 깨닫고 이웃과 더불어 겸손한 삶을 살아가라는 초청이요 권면이다.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과 함께 이날은 또한 ‘회개’의 메시지가 선포된다. “복음을 믿고 회개하라”는 예수의 선포가 다시 울려 퍼진다.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과 함께 진정한 회개의 시간을 가지라는 의미이다.

오래전에 이창동 감독이 만든 <밀양>이라는 영화가 상영된 적이 있다. 이 영화는 진정한 회개와 용서의 의미를 잘 보여준다. 줄거리를 간단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은 주인공 신애는 어린 아들과 함께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남편의 고향 밀양으로 이사한다. 그녀는 낯선 땅에서 정착하여 잘 살아가려고 하는데 그만 아들이 유괴되는 비극을 겪게 된다. 유괴범과 협상하여 아들을 되찾으려 했지만 결국 아들은 살해된 채 발견된다.

이후 신애는 극도의 우울증과 경계심을 가지고 어렵게 살아가다가, 우연히 교회에 나가게 되어 개신교인이 된다. 그녀는 교인들에게 “이제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행복하다”고 말할 정도로 열심히 교회에 다니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혼자 있을 때면 여전히 아들 생각에 눈물을 쏟고, 여전히 낯선 타인을 극도로 경계한다. 진정으로 평화를 얻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는 유괴범을 직접 찾아가 대한 용서하기로 결심한다. 그래야 진정으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애는 교도소로 유괴범을 찾아갔다. 그런데 유괴범은 신애의 예상과는 다르게 너무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신애는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용서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오히려 유괴범은 성경책을 든 채 신애를 위로하며 “나는 이미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 마음이 편안하다”는 말을 한다. 그 말에 신애는 큰 충격을 받는다. 그녀는 교회에 가서 십자가를 보며 이렇게 항변한다. “어떻게 용서를 해요? 용서하고 싶어도 난 할 수가 없어요. 그 인간은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데. . . 그래서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는데. . . 내가 그 인간을 용서하기도 전에 어떻게 하나님이 그 인간을 먼저 용서할 수 있어요?”

유괴범이 자기는 이미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서 마음이 편하다고 태연하게 말하는 것이 충격적이다. 정작 자기로 인해 아들을 잃고 슬프게 살아가는 피해자한테는 사과 한마디 하지 않은 채 말이다. 정말 하나님께 죄를 자복하고 모두 용서함을 받으면 그것으로 다 되는 걸까? 그 용서는 피해자와는 무관한 것인가? 신애는 당연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자신은 진지한 사과를 한 번도 받은 적도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용서라는 말을 함부로 꺼낼 수 있단 말인가? 피해자가 빠진 용서는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유괴범이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를 받았다고 하는데, 도대체 그 하나님은 누구인가?

이 영화는 이른바 온갖 은혜로 치장한 거짓 신앙인들의 위선을 고발한다. 회개의 구체적인 내용이 들어 있지 않고 또 그것을 사과하는 실천적인 삶으로 연결되지 않은 신앙의 문제를 고발한다. 이런 신앙을 일찍이 본회퍼는 ‘값싼 은혜’의 신앙이라고 비판했다. 말로는 회개, 용서, 사랑 따위를 외치지만 세상 속에서 고난과 희생을 감수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결여된 신앙 말이다. <밀양>의 유괴범이 망각한 것은 피해자에 대한 진지한 사과와 참회이다. 이것은 단순히 한 번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피해자가 그를 용서할 때까지 반복적으로 용서를 고하고 피해자의 삶을 회복시켜줄 수 있는 구체적인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회개와 이로 인한 용서는 종착점이 아니라 출발점이다. 용서는 다시 시작하라는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용서를 받고 어디로 갈지, 무엇을 할지, 누구에게로 갈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진정으로 회개하고 용서를 받은 사람이라면 이에 따르는 후속 조치가 필요하다. 즉 철저히 속죄하는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람을 유괴해서 죽인 자라면 하나님의 용서만 들먹이지 말고 당장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피해자의 삶이 회복되도록 실제로 돕는 행동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영국의 한 교회 안에 장식되어 있는 "회개의 창".(출처:위키미디어커먼스)

종교개혁으로 사라진 ‘보속’(penance)이라는 개념이 있다. 보속은 죄를 회개한 후 실천하는 속죄 행위를 말한다. 즉 잘못에 대해 깊이 뉘우치는 참회의 구체적인 모습을 의미한다. 종교개혁자들은 당시 ‘보속’이 ‘행위’를 통해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식으로 오용될 수 있고, 은총을 통해 의롭게 된다는 교리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 개념을 배척했다. 이 개념이 사라지자, 이제 저지른 잘못을 뉘우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즉시 용서하시고,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 현실은 그렇게 쉽지 않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으면, 그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인 것이다. 바로 구체적인 속죄의 행위를 실천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후속 행위가 수반되지 않는 말뿐인 회개와 용서는 빈껍데기 신앙인을 양산할 뿐이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눅3:7)고 선포하지 않았던가?

올해도 사순절이 시작되었다. 머리에 재를 뒤집어쓰고 겸손히 우리의 유한한 존재를 묵상할 때이다. 또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 앞에, 이웃 앞에, 역사 앞에, 자연 생태계 앞에 회개하면서 용서를 구할 때이다. 오늘 우리의 현실을 뒤돌아볼 때 이런 회개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없는 듯하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회개는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이런 통찰과 결단이 있을 때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새 창조의 역사를 우리 모두 맛보게 될 것이다. 사순절은 회개의 때이다.

“오늘날

내 살아가는

뜻을 삼아 주옵시며

식어버린 노을 속에

빈 몸으로

서 있는 나무들

두려움 없이 되어가야 할 어느 날

당신의 뜻이게 하옵소서.”

(겨울기도-박효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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