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슬리를 거역하는 웨슬리안?
웨슬리를 거역하는 웨슬리안?
  • 민돈원
  • 승인 2021.09.14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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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도들이라면 존 웨슬리를 귀에 따갑도록 말하고 듣고 자란다. 그러므로 진정한 존 웨슬리가 남긴 유업을 계승하여 따르고자 한다면 재고해야 할 게 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감독제도이고, 동시에 감독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목회 목표로 삼는 것처럼 비추어지는 게 진정한 웨슬리안 인가? 하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존 웨슬리 조부 존 웨슬리(손자와 이름이 동일,1636-1678)는 비국교도였고, 그러기에 국교회의 성직 안수를 거부하는 이유로 체포되어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자리에서 '나는 직책에 부름받은 게 아닌 복음전파와 목회에 부름 받았기에 영국교회의 안수받을 필요 없다.'(김진두 저, 웨슬리의 뿌리.p.28)라고 한 사실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존 웨슬리의 부친 사무엘 웨슬리(1662-1735) 역시 72세 소천되기까지 외진 시골교회 사우스옴스비와 이후 엡웟에서 44년간 목회 일생을 마쳤다.

그는 조부와는 달리 비록 국교도였기에 1694년(32세) 한 때 아일랜드에 감독으로 추천되었으나 거부 되었다.(김진두 저, 위의 책, p.42) 이를테면 감독 정치와 무관한 가문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웨슬리 부친이 왕의 호의를 입은 국교도였기에 당시 적의감을 가진 엡웟 지역 사람들로부터 심한 위협과 공격을 당하기도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P.44) 그러나 이들이 신앙지도를 받아 평생 믿음의 좋은 가족으로 변화 되었다.

더욱이 존 웨슬리는 제도권에 종속되어 교단 정치에 능한 달인이기보다 화석화된 제도주의자가 아닌 비국교도로서 일생 복음을 전파함은 물론 복음에 충실한 실천적인 삶을 살았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와같은 전통을 감리회가 잃지 않았던들 오늘날과 같이 누군가는 그 제도권의 자리에 세워야 한다는 필요악의 교권 헤게모니의 타락, 이 과정상에서 끊어지지 않는 추한 금전살포로 인한 권모술수,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개인의 영광을 취하려 하기에 경건과 거룩성을 상실한 감리회로 전락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감리교회라는 제도가 감독 일변도의 세상 정치 권력처럼 이미 깊숙이 뿌리내린 제도화로 인한 부패이다. 제도를 시작할 당시의 좋은 의도로 출발한 본질에서 크게 빗나감으로써 복음의 변질을 비롯한 고질적인 폐해를 지적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세상 정치는 으레 돈, 권력, 그리고 협박에 휘둘러지지 않는 경우가 거의 없다. 왜냐하면 '자리 준다, 표 준다, 그래야 면죄부를 받을 수 있다' 라고 회유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부패와 탐욕에 찌든 자들이 타락한 정치하는 것을 보다 못한 보편적 시민의 가치를 가진 자들이 한 시대에 들풀처럼 일어난 게 성경의 선지자들이고 그 시대의 의로운 개혁가들이고 그리고 무명의 독립투사이고 애국지사들이다.

이 나라를 지켜온 자들이 돈과 권력 그리고 협박에 휘둘러진 위정자들이 아니었던 것처럼 교회 역사도 교회가 무참히 짓밟히고 권력에 자유를 빼앗길 때 회유되지 않고 시대적 책무를 다하는 침묵하지 않는 창조적 소수의 목소리가 반드시 필요하다. 특히 이 시대가 그런 인물을 부르고 있다고 본다.

독일 나치 치하의 마틴 니묄러(1892-1984) 목사 고백이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잡으러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가 아니었기에,

그 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에,

그 다음은 그들이 유태인을 잡으러 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태인이 아니었기에,

그 이후 그들이 나를 잡으러 왔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본질로 돌아가자, 부패한 권력에 침묵으로 일관한 교권 가진 자였거든 수치스러운 줄 알아야 한다. 모세는 바로의 왕자로 일컬음을 받으며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며 살아가는 삶을 물리치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 이유가 믿음 때문이었다. 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믿음은 내 일신상의 편안함도 아니요, 권력에 기생하여 더 나은 목표를 성취하기 위함은 더더욱 아니다.

그렇다면 믿음이라고 말하면서 제도권에서 누릴 수 있는 안락과 풍요를 추구하며 성골 행세하느라 코로나 상황의 지난 2년간 교회가 침탈당할 때 부역하였거든 이제라도 회개하고 기회만 있으면 목소리 내던 것 이제는 자숙하고 도리어 침묵할 때다.

웨슬리를 말한다고 웨슬리안이 아니다. 웨슬리를 안다고 다 웨슬리안이 아니다. 더욱이 웨슬리를 거역하면서 웨슬리안이 될 수는 없다.

모름지기 하나님이 예비해 두신 진정 따를만한 민족의 지도자, 스승, 그리고 거룩한 영적 리더들을 이 영적 기근의 시대에 다음 세대를 위해서라도 우리 주위에서 나와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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