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요케 하는 길, ‘자기 비움’
부요케 하는 길, ‘자기 비움’
  • 정택은
  • 승인 2018.03.22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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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교회의 구성원들을 보면 돈도 있고 학력도 높으며 좋은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그런 배경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교회의 힘으로 생각하며 좋아한다. 하지만 교회 밖의 시선은 곱지 않다. 이미 여러 방면에서 강자의 위치에 있는 교회에 대해 세상 사람들은 그들이 아는 교회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가난을 말하기에는 가진 것이 너무 많다.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으면서도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을 ‘영적 가난’이라는 말로 희석시켜 자신들을 변명한다. 자신의 부는 불의한 부와 구별된 것이라며 정당성을 설명하곤 한다. 그러나 이는 가난한 자, 핍박을 받는 자들을 허탈하게 만드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전반적으로 약자라기보다는 강자의 모습에 가까운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렇다면 가난해질 용기는 없어도 가난하지 않음을 인정하는 솔직함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교회의 말이나 행동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최소한 우리는 사회의 강자로 살면서도 약자를 자처하는 비현실적 이중성을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기독교인이라면, 부유하지만 영적으로 가난하고, 힘이 있지만 거기에 의존하지 않으며, 유명하지만 세상의 명성에 연연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미 강자들이며, 또 강자의 삶을 추구하고 있다. 교회내의 약자들도 이런 세상적 강함을 동경하고 추구한다는 점에서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는 여전히 마음 가난한 청부론을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지금 우리의 모습은 아니다. ‘돈이 없어 교회에 다니기도 어렵다’는 불평은 교회의 모습을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교회에서 말하는 성장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성장’과 크게 다르지 않고, 교회에서 말하는 ‘축복’도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복’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래서 세상에서 영향력은 교회 안에서의 영향력과 함께 간다. 세상의 약자는 교회에서도 약자라는 부담을 느낀다. 결국 최종적 기준은 하나님의 가치가 아니라 세상의 가치가 기준이 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를 하나님 안에서 부요케 하는 그리스도의 길은 끝없는 자기 비움이다. 교회의 과제는 세상의 강자로서 연약한 자들을 돕는 것이기 전에 ‘연약함’이라는 복음적, 선교적 삶의 자세를 회복해야 한다. 바울은 세상의 지혜에 현혹된 고린도 성도들에게 “복음의 수사가 아닌 복음의 능력을 보이라”고 다그쳤다(고전4:19). 세상과 똑 같은 삶을 복음적 언어로 포장하는 위선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으로 형성된 삶을 보여주라는 것이다.

교회가 얼마나 가난한가하는 것은, 세상에서 홀대 받는 가난한 자들이 교회에서는 대접받고, 세상에서 별 볼일 없는 사람들도 교회에서는 소중한 사람으로 대접받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는 약자에게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이들을 향한 교회의 관심은 강자의 선행이기 전에 자기 본질에 충실하려는 영적 노력과 결부돼야 한다. 강자의 패러다임을 지향하면서 약자도 강자로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를 뒤집는 노력 속에 그 세상적 가치에 눌린 약자들의 선한 이웃으로 서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약자에 대한 교회의 관심은 약자를 도움으로써 스스로 강함을 역설적으로 확인하는 자선과 달리, 약함으로 강함을 이기는 역설적 본질을 확인하는 자기 존재의 표현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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