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부흥을 새롭게 외치자
우리 시대의 부흥을 새롭게 외치자
  • 정택은
  • 승인 2018.03.15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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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이 전파된 지 130여년 만에 한국교회는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큰 부흥을 이루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여전히 부흥을 이야기 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눈에 보이는 외적 화려함을 추구하고 구호만을 외치는 값싼 부흥이 넘쳐나고 있다. 부흥이 단지 유행어가 되어 버렸다. 이 땅에 복음이 전파되어 대부흥을 이루었던 시기의 가슴을 찢는 내면의 깊은 회개와 통회가 있는 부흥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오늘 이 땅에서 진정 한국교회가 추구해야 할 부흥은 무엇일까?

한국교회의 부흥의 시작은 1905년 을사늑약, 1910년 한일합방, 1919년 3·1운동 등 한국근대사에서 가장 처절하고 암울한 사건들의 연속이었던 시기에 이루어졌다. 이 민족이 죽음 직전에서 숨도 쉬기 어려웠을 때 하나님께서는 한국교회에 복을 주셔서 희망을 볼 수 있게 해주신 것이다.
또한 16-18세기 서구 지역에서 발생한 위대한 부흥의 역사를 보면, 마치 돌멩이 하나가 잔잔한 호수에 수없는 파장을 일으키는 것처럼 주변의 모든 사회에 영향을 주었다. 단지 사람들이 회심하고 신앙을 갖는 것뿐만이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한 단계 진보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아원사역, 학원사역, 문맹사역 그리고 빈민사역 등 온전한 의미의 부흥을 위한 사역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와 함께 시작되었던 것이다.

현대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부흥으로 손꼽히는 17세기 말에 시작된 영국의 부흥은 두 계층을 통해 이루어졌다. 존 웨슬리에 의해 시작된 감리교의 부흥, 그리고 존 밀튼과 헨리 벤 그리고 상원의원인 윌리엄 윌버포스 등 상류계층을 중심으로 한 영국국교회의 부흥이었다. 이 부흥에는 경제인, 정치인, 문인들까지 영국사회의 모든 계층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영국의 혁명이 프랑스의 대혁명과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즉 프랑스의 혁명에는 영적 부흥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폭력이 난무했고 많은 희생자를 발생시켰다. 반면에 영국에서 거의 한 세기 동안 지속된 빅토리아 시대의 혁명은 영적부흥과 함께 놀라운 축복의 역사였던 것이다.

영국 부흥의 관점에서 볼 때, 진정한 부흥은 먼저 사람들이 기독교적 관점을 갖고 있음을 전제로 한다. 즉 부흥은 숨겨진 기독교적 관점들이 살아나도록 하는 것이었다. 만일 우리 사회가 완전히 세속적이라면 그 안에서는 부흥이 일어날 수 없다. 부흥의 대상은 세상문화가 아닌 세상에 묻혀있는, 그 곳에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기독교문화를 일깨우는 것이다. 영국을 일깨우셨던 성령은 오늘날에도 이미 각 사람들의 마음에 계셔서 부흥을 통해 개인과 그들의 문화를 일깨우시는 것이다.

이 시대의 참된 부흥은 무엇인가? 참된 부흥은 개인과 사회의 변혁이다. 진정한 부흥이란 복음이 각 사람의 내면에 받아들여져 한 개인이 변화되는 것이다. 또한 한 개인의 삶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전체의 변화를 이끄는 것이다.

사실 오늘 우리의 교회와 사회는 변화의 필요를 느끼고 있다. 인간의 이기심으로 교회가 오히려 지나친 경쟁을 부추기고 있고, 인간의 필요를 교회가 채워주려 하다 보니 인간의 이기심을 정화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추기는 경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진정한 부흥을 이루기를 원한다면 사도행전 2장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사도행전에서 나타난 성령강림은 시대적 절망과 좌절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도행전의 부흥은 향락과 풍요를 누리는 중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위기상태에서 일어난 것이다. 더 이상 길을 발견할 수 없다는 절망의 상황에서 부흥은 시작된 것이다.

마치 예수의 제자들이 십자가에서 예수를 잃어버린 그 절망의 상황에서 예수의 부활 경험을 통해 희망의 빛을 본 것이다.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부활과 함께 절망이 희망으로 교차하게 된 것이다. 이렇듯 진정한 부흥이란 절망과 희망의 교차로에 놓여있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풍요함을 경험하고 있지만, 그러나 가장 무서운 적은 바로 이런 풍요에 있다. 이런 풍요 속에서 한국교회는 위기를 말하고 있다. 이로 볼 때 부흥은 외적으로 화려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내적으로 깊은 회개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우리의 영적 현실을 바로 직시하고 우리가 얼마나 영적 감각을 잃어버린 채 살고 있으며 믿음의 위기에 처해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교회들과 크리스천들이 아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내면적 절망의 위선과 거짓을 발견하고 회개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진정한 부흥을 원한다면 내면을 깊이 성찰하여야 한다. 우리의 마음속에 고통, 아픔, 눈물과 죽을 것 같은 절망감을 정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변화해야 한다. 그러나 누군가 자신을 바꾸려고 한다면 거부하고자 할 것이다. 변화를 거부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아무문제 없이 잘 살아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누구든지 주님을 따라오려거든 자신을 부인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부인이 필요하다. 성령의 삶이란 날마다 새롭게 되는 변화이다.

이러한 온전한 변화를 위해서는 세 가지 원칙이 있어야 할 것이다. 첫째, 변화는 목적이 있어야 한다. 정체성 없이 그냥 변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목적과 방향 그리고 주체성이 있는 변화여야 한다. 그리고 한번 결정한 것은 고통이나 거절이 있어도 흔들려서는 될 것이다. 둘째, 변화는 창의적이어야 한다. 구태의연하고 모방적인 변화는 오래가지 못한다. 생명은 창조적으로 변화하고 항상 새로운 것이다. 셋째, 변화는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 지금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 이것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순교이다. 순교는 피 한 방울로 복음의 씨를 뿌린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엄청난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부흥을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변화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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