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에 대한 상사병(相思病)에 이르라
주님에 대한 상사병(相思病)에 이르라
  • 민돈원
  • 승인 2017.08.26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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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회 인터넷 신문인 당당뉴스에 실린 기사 중에 그 신문의 고정 논객(論客) 신 모집사의 이런 제목의 최근기사(2017.8.20.)를 읽은 적이 있다. 제목은 <교회병에 걸린 기독교인들> 그리고 그 밑에 부제로 ‘교회놀이와 예배장사’라는 제목에서 보여주듯이 매우 자극적 용어로 시작하는 내용이었다. 글의 요지는 수많은 예배, 이를테면 주일 낮, 오후 또는 밤,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그리고 새벽기도회 등 1주일이면 이렇게 예배를 극성스러우리만치 많이 드리는데도 최근 각종 부정과 비리 등 사회주범가운데는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에 해당하는 최근 교회 지도자들-예배를 강조하는-이 도리어 그 중심 한복판에 있다고 비판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나아가 바로 그런 교회 지도자들이 성도들에게 겨우 주일예배 한번 나온 것만으로는 부족함으로 모든 예배를 꾸준히 참석하도록 예배로 사람을 유혹하고, 예배로 사람을 가두고, 예배로 사람을 오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들을 지칭하여 '교회 놀이'와 '예배 장사'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이런 모습을 척결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물론 그의 이런 비판과 주장에는 교회에 대한 깊은 애정과 희망을 기대하고 있기에 이대로는 안 되지 않느냐? 라는 애정 어린 강한 질책이요 영적인 메스(mes)를 가하는 뼈아픈 목소리로 이해하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현직에서 목회하고 있는 대부분의 목회자에게 성도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를 꼽으라고 한다면 그중의 하나가 아마 꾸준하고 성실하게 드리는 예배를 빼놓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아울러 건강한 교회, 성숙한 성도를 위해서도 이 부분이 잘 될 때 예배에 따른 삶이 뒤따르지 않겠는가? 문제는 앞에서 언급한 신 집사의 주장과 같이 드리는 예배가 얼마나 많이 드려졌느냐보다는 얼마나 진실과 온 몸과 온 마음, 즉 전인격적인 예배로 드려졌느냐 하는 점에 관한 한 짚고 넘어야 갈 대목이다. 사실 이 부분이 모든 목회자들의 고민이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풀어야 할 과제라고 여겨진다.

예컨대 교회 다닌 지 수 십 년이 되었는데도 예배횟수도 그렇고 질적 내용을 보더라도 제대로 드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반면에 교회 다닌 지 얼마 안 되었어도 도리어 오래 다닌 사람들보다 더 나은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도 있다.
이는 아마도 처음 믿음 생활 시작할 때에 누구에 의해 어떻게 학습되어졌고 어떤 훈련을 받았느냐의 차이라고 보여 진다. 다시 말해 잘못된 예배를 아무런 수정이나 개선하려는 노력 없이 오래도록 기계적으로 드리고 있다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라기보다는 그저 일상적인 삶에서 일어나는 주일 일과의 여가중의 하나로 전락시키고 만 격이다.
바꿔 말하면 예배가 나의 사건이 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내가 정리한 예배는 이렇다. 예배란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시는 신적 계시의 사건이요, 동시에 내 삶에 새로운 결단이 일어나는 사건이어야 한다고 본다.

내가 목회하는 교회 성도들의 경우 어떤 사람은 신기할 정도로 주일 낮에 1년 중 거의 80-90%가까이 출석하지만 그 외 어떤 예배도 나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 물론 이들에게는 교회 봉사도 일절 없다. 헌금도 거의 보기 힘들다. 성도들과의 교제도 거의 없다. 전도나 기도는 더더욱 없다. 그런가 하면 주일 낮은 물론 밤, 수요, 새벽. 특별초청집회나 부흥성회, 연중 몇 차례 실시하는 특별기도회에도 거의 빠지지 않는 열성파(?)가 있다. 이들의 숫자는 전체의 약10%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들의 경우 모든 예배에 거의90~100% 출석에 근접한다. 나아가 실제 신앙을 토대로 한 그들의 삶을 보아도 그렇지 못한 성도들에 비해 신뢰할 만 하다고 할 수 있다. 즉 그들을 보면 가정에도 충실한 분들이다. 그런 이들을 향해 교회 병에 걸린 목사가 ‘예배 장사’하는 행위라고 혹평한다면 너무 과격한 표현이 아닐까?

지난 수요예배 시간 전이었다. 어느 집사님이 목양실에 찾아와 드릴 말씀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9월부터 돈 벌러 가기위해 수요예배를 3개월쯤 못나올 것 같다는 것이다. 본래 주일도 가야하는데 주일만큼은 그 분이 못 간다고 약속을 받은 것 같았다. 무슨 답을 주어야 할까 듣고 나서 최대한 예배 시간 전에 올 수 있도록 일을 맡은 주인에게 양해를 구해보도록 하라고 한 후 다시 예배 시간 중에 10월에 부흥성회도 있으니 아예 돈 벌러 가는 일을 취소하라고 했다. 충분히 그런 말 정도는 소화할 수 있는 분이라고 믿기에 하는 말이었다. 그러자 예배 끝나고 하는 말씀,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해야죠!’였다. 아직 어떤 선택을 할지는 9월 첫 주가 지나보아야 알 일이다.

이처럼 나는 예배를 지독히도 강조하는 목사중의 한 사람에 속한다. 내가 그 분에게 이렇게 하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 때문이다. 신앙생활에 원칙과 기준을 지키라는 이유 때문이다. 기준이 무너지면 그것만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지도 못했던 다른 것들이 줄 지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요, 동시에 잘 나오던 사람이 예배 빠지기 시작하면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도 도미노 이론처럼 연달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라고 권면한 것에 근거한다.

솔직히 성도들이 직장에서 돌아와 저녁이면 집안에 챙겨야 할 일이 왜 없겠는가? 그게 아니더라도 힘들어 쉬고 싶은 마음도 들것이다. 종종 까닭 없이 그냥 거르고 싶은 마음도 들 것이다. 이 때 그런 그들에게 인간적으로 사정을 다 들어주고 비위를 맞춰 주어야 인정받는 목사가 아닐까 하는 갈등이 들 때도 없지는 않다. 예전에 있던 교회에서 지방 행사로 어쩌다 예배가 없다고 광고하자 성도들이 그렇게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런 거 보면 조금은 의무감에서 나오는 경우도 적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런 속에서 믿음은 자라가는 것 아니겠는가? 밥 잘 먹어야 살지만 그렇다고 밥 먹는 것이 항상 기쁘고 입맛이 당겨서만이 먹는 것은 아니지 않던가?

따라서 예배가 많다고 흠이 되고 더욱이 크게 문제 삼을 흉이 될 이유도 아니다. 왜냐하면 어느 날 예배가 점점 줄어든 사람의 경우는 도리어 교회도 멀어지고 결국 신앙생활을 하차하고 만 경우를 보아왔기 때문이다. 다만 예배에 대한 내용이나 자세는 더 나은 예배, 삶의 변화로 이어지는 예배가 되도록 분명 교회에 속한 지도자들과 성도들이 함께 고민하고 그 시대 시대마다 끊임없이 풀어가야 할 우리 앞에 놓인 과제임이 분명하다. 예배가 흔히 말하듯이 하나님을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시간이고, 우리를 지으신 분을 경배하고 영광 돌리는 것이라면 매일 내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일이야말로 가장 중요하고 0순위에 두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아무리 먼 길도 지루하지 않고 가깝게 느껴진다. 사랑하면 빚을 내서라도 필요를 채워준다. 사랑하면 죽을 만큼 힘이 들어도 참을 수 있다. 사랑하면 아무리 요구하는 게 많아도 다 들어주려고 애를 쓰는 법이다.
주님이 우리를 향해 베푸신 사랑이 그러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상사병(相思病)에 가까우면 예배드리는 하나부터라도 이와 같아야 하지 않겠는가? 마치 진정 사랑하는 연인이 무엇을 요구하더라도 다 들어주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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