눌린자에게 자유를!
눌린자에게 자유를!
  • 이구영
  • 승인 2014.10.10 11: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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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40일을 금식하신 소문이 갈릴리 땅에 돌았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40일을 금식하며 기도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구약성경에도 보면 모세가 40일을 금식하며 기도했고,
엘리야 선지자가 40일 금식하는 것이 소개되어 있지 다른 사람들은 감히 생각도 못할 정도입니다.
그만큼 인간이 도전하기도 어렵고 성공하기도 어려운 것이 40일 금식기도입니다.
그 힘든 40일 금식을 예수님께서 유대 광야에서 마치셨다는 소문이 이스라엘 전역에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시험 후에 마귀의 유혹을 이겨내시고 고향 땅 갈릴리 나사렛으로 오고 계신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특별한 뉴스거리가 없던 당시에 이 뉴스는 입에서 입으로 계속 전하여 졌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하나님께 어떤 음성을 들었는지, 또 어떤 능력을 받았는지도 알고 싶어 했습니다.
혹시 병이라도 고칠 수 있지 않을까?
혹시 기도 한번이면 내가 갑자기 부자가 되지는 않을까?
혹시 나를 괴롭히는 악한 귀신이 떠나지는 않을까? 별의 별 생각을 하면서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고향 동네 나사렛에 오시자 기대와 설레임으로 가득찼던 동네 사람들이 다 회당에
모였고,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했습니다.
어떤 신비한 것들을 보고 싶어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동네 어르신들을 위해서 어떤 기적도 베풀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에게 임했던 구원의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사렙다 과부의 이야기와 수리아 사람 나아만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이 두 사람은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사르밧 과부는 큰 흉년에서 살아났고,
나아만은 문둥병에서 고침 받은 사람이라고 소개하셨습니다.
그러자 혈통과 유대인만의 구원을 강조하던 동네 사람들이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40일 금식하신 후에 일어난 최고의 변화는 성령의 임재이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성령님의 임재의 결과로 이제 앞으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해질 것이고,
포로된 자들이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고,
눈 먼 자들이 다시 보게 될 것이며,
눌린 자들이 자유함을 얻게 될 것임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은 은혜의 결과가 보여질 것이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의 이기적인 기대는 곧 실망과 분노로 변하기 시작했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달려들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하나님께로 나아가면 성령의 임재하심을 늘 경험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도를 통해서 부자가 되고 싶고, 병을 고침 받고 싶고, 하루 아침에 신세가 달라지기
를 간구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도깨비 방망이를 휘두르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기도를 통해서 사람들이 이 힘들고 험한 세상을 견디고 믿음으로 승리하여
거룩함과 경건함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해 주십니다.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고, 세상에서 죄 가운데 미움과 욕심속에 방황하는 사람들을 바른 길,
천국의 길로 인도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해 주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과 사람들의 요구 사이에는 큰 간격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탄식은 사람들이 죄를 사랑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잊어버리는데 있습니다.
돌아와야 할 본향으로 돌아오지 않고 세상에서 유리방황 하는데 하나님의 탄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불신앙의 죄 가운데 본향으로 가는 길을 잃은 자녀들을 위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신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분을 믿고 그분이 지시하는 길을 따라 오기만 하면 누구든지 천국에 이르도록 문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성령의 임재 하심 속에, 나를 누르고 있는 무지와 죄를 벗어 버리고
큰 자유와 기쁨 속에서 영생의 길을 찾지 않고
현실적 이익만을 추구하며 계산적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 동네에서 또 박대를 받으실 것 같습니다.
죄에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시겠다고 하여도, 사람들은 죄는 견딜 만 하고 즐길 수 있으니 오히려 돈을 달
라고, 건강을 달라고, 성공과 쾌락을 달라고 외칠 듯 합니다.
재차 예수님께서 아니라고 너희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죄로 부터의 자유요, 심령의 가난함이요, 영적 무
지의 눈을 떠서 하늘의 신령한 것들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외치셔도 사람들은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고,
실망한 나머지 또 낭떠러지로 밀쳐버리려 할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는 왜 예수님을 기대합니까?
아니면 우리는 왜 예수님께 너무 실망하고 찾으려 하지 않습니까?
고향 동네 어른들처럼 현실적 이익만을 추구하다 보니 그분의 외침이 싫어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죄의 문제나 천국의 기쁨이나, 하나님의 은혜가 소홀히 여겨지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 하나 만이라도 성경이 말씀하는 그 소중한 가치를 존중히 여기고
자유함과 은혜를 주시는 예수님을 날마다 사모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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