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채플은 기독교대학 정체성의 근간이다
대학채플은 기독교대학 정체성의 근간이다
  • 민돈원
  • 승인 2021.06.08 11: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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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대학의 상황은 어느 대학도 예외없이 녹록하지 않을 정도로 비상시국이다. 왜냐하면 우선 학령인구 감소로 전체 대학 입학정원 수보다 지원자가 더 적어 정원미달 현상 때문이다. 게다가 지난해부터 몰아닥친 코로나19로 인해 자퇴자들 내지는 진급 포기자들이 속출하고 있어 속수무책이다.

이런 공통분모가 등록금에 의존하는 재정의 문제라고 한다면 이와는 달리 기독교 건학 이념으로 세워진 일부 대학의 경우 추가되는 또 다른 고충이 있다. 그것은 기독교 학교의 정체성 위기이다. 즉 보이지 않는 영적인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 채플운영의 난항 때문이다. 내가 대학 다닐 때만 해도 불신자 비율이 지금보다는 상대적으로 많지는 않았지만 지금처럼 국가 인권위원회가 채플을 억지로 강요하는 것에 대해 위법이다. 는 식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더러 채플에 관심없는 자도 없지는 않았지만 반대가 극심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패스를 해야 졸업이 되는 학사 규정이었으나 이것을 가지고 인권탄압이라고 사납게 생떼를 쓰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들어와서는 건학정신의 근간을 흔들만큼 외부의 압력도 심해지고 있다. 더욱이 내부 학생들의 채플에 임하는 태도가 도를 넘었다는 숭실대 재직하는 동기 교수의 얘기다. 1897년 평양에서 기독교 정신으로 세워진 숭실대의 경우는 1-3학년생 채플이 필수과목이다. 이처럼 채플이 해가 갈수록 향상되지 않고 불만이 높아지자 학교 당국으로서는 특단의 대처를 모색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번 신임총장이 궁여지책으로 1학년 일부 학과를 대상으로 시험 운영하겠다는 획기적인 추진안을 제시한 것이다.

바로 ‘소그룹 채플’ 운영이 그것이다. 예배설교와 같은 원 웨이 방식과는 달리 각각 테이블에 약 7-8명의 소그룹 학생들을 대상으로 다수의 목회자를 각각 리더로 배치해서 양방향의 소통을 통해 긍정적 참여를 모색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를 위해 학교 동문 목회자를 중심으로 한 소그룹 리더들을 확보하기 위해 교목실과 실무에 밝은 교수를 중심으로 약 40명이 선발되었고 나도 그중에 일원으로 참여하게 될 예정이다. 그리고 지난주 숭실대에서 다음 학기 소그룹 채플 운영을 위한 오리엔테이션이 있어서 다녀왔다.

여기에 강사로 개체교회를 담임하는 전주대 특임교수로서 소그룹을 책임맡고 있는 분이 그 대학 모델을 소개했다. 그 내용 중에 요즘 청년들을 ‘제트세대’라고 표현했다. 빠르다는 뜻일 게다. 말의 속도도 빠르고 춤도 빠르고 노래도 빠르고, 반응도 빠르고 화내는 것도 빠르고 문자도 최소화로 간결한 것 보면 맞는 말이다.

그런데 더 주의해야 할 사실은 제트세대는 자신들에게 싫은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교회에 오면 어른들이 너 인사도 안 해, 예배시간에 너 그게 뭐야, 예배드리는데 왜 커피 가지고 오는 거야, 예배 태도가 왜 그래? ... ’

교회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소리 하면 속칭 ‘꼰대’ 소리 듣는다, ‘그런 말 들으면 교회를 다 떠난다’ 라고 우려하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들과 세대 차이이기도 하고 문화 차이가 교회 안에서도 두드러지게 들어와 있다는 청년들을 접하며 경험한 우려 섞인 현장의 목소리였다.

사실 종전까지는 문화차이, 문화충격이라는 용어를 말할 때면 대체로 해외 선교지에서 일어나는 일로 여겼던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이런 현상들이 목회 현장에서나 기독교학교 현장에서도 총체적으로 피할 수 없고 해법을 찾아야만 하는 맞닥뜨려지고 있는 현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가히 그 시원한 해법이 0 X 답안지나 4지 선다형 답안처럼 명확하지 않다는 데 있다. 따라서 부단한 시행착오가 따를 수밖에 없다. 지역이나 학교 사정, 정서, 학생 성향 등이 또한 다르기에 똑같이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라는 게 일선 실무자의 얘기다.

나는 한 시대를 살아가되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그리스도 복음을 전하는 목사로서 외마디처럼 외치고 싶은 게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복음의 역동성을 지나치게 국가권력이 최근 인권 평등이라는 천편일률적인 잣대로 기독교 학교 정체성을 제한하고 심지어 해체하려는 경향에 대해 큰 우려를 금할 수 없다.

그렇지 않아도 위에서 제시한 대로 기독교에 대해 반감을 가질 수 있는 자유분방한 청년들에게 교내에서 전도하고 채플을 가르치면 ‘신앙을 강요한다, 인권을 침해한다.’ 는 등의 누명을 씌우고 예전처럼 전도를 막아버리고 학교 당국에 압력을 행사하는 풍토는 기독교 학교의 정체성을 포기하게 하는 것이요, 그 건학정신을 훼손하는 것에 다를 바 없다. 부분적인 잘못을 시정하면 될 일을 어찌 건학 이념까지 흔들게 해서야 되겠는가?

이런 힘은 정통성을 잃은 지배자의 논리이고, 이스라엘 분열 왕국이 성전을 무너뜨린 악한 역대 왕들로 인해 백성들마저 편승하여 악을 행하고 돌이킬 줄 모를 때 역사가 증거 해 주는 것처럼 패망의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알다시피 기독교 대학뿐만 아니라 한국의 초중고 기독교 학교들이 기독교 정체성이 더욱 공고히 되었던 지난날 자랑스런 독립운동의 선각자들, 민족의 얼을 품은 애국애족의 산실로서의 그 모체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과 부활의 소망을 가진 복음의 정신으로 무장한 신앙교육 때문이 아니었던가?

바라기는 기독교 학교 채플이 살고 건학 이념의 정체성이 보장되고 발휘됨으로써 이 나라가 다시 회복되고 희망을 노래하며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을 믿는다(신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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